9월, 총회의 계절
해마다 9월이면 한국 장로교회의 주요 교단들이 저마다 정기총회를 엽니다. 합동, 통합, 고신, 백석. 이름은 비슷하지만 서로 다른 교단이고, 총회도 각자 엽니다. 전국의 총대들이 모여 한 해의 굵직한 안건을 결정합니다.
그 안건 중에 유독 무거운 것이 있습니다. 어떤 운동, 어떤 가르침이 이단인가 하는 판정입니다. 솔직히 묻고 싶지 않으십니까? 사람이 사람의 신앙을 판정할 자격이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
이 글은 판정의 ‘결과’가 아니라 ‘잣대’를 다룹니다. 잣대를 알면 결과를 스스로 검증할 수 있습니다. 남의 판단을 그대로 받는 신앙과 확인하고 받는 신앙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분별은 성경의 명령이다
교회의 판별 작업은 사람이 만든 제도가 아닙니다. 성경 자신의 명령입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 요한일서 4:1,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첫 단어가 ‘사랑하는 자들아’입니다. 분별은 의심 많은 사람의 취미가 아니라, 사랑받는 자녀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바울은 더 강경합니다. 하늘의 천사라도, 심지어 바울 자신이라도, 전한 복음과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갈라디아서 1:8). 기준은 전하는 사람의 능력이나 인기가 아니라 전해진 내용 그 자체입니다.
그러면 판별은 어떤 방식으로 합니까? 사도행전 15장이 원형을 보여줍니다. 할례 논쟁으로 교회가 갈라질 위기에 처하자 사도와 장로들이 예루살렘에 모였고, 토론했고, 성경에 비추어 결론을 내려 모든 교회에 문서로 보냈습니다. 교회사 최초의 총회입니다. 오늘 한국 교단들의 총회 결의는 이 본문의 후손입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성품 하나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은 진리를 계시하시고, 그 진리가 흐려지지 않도록 교회에 파수의 책임을 맡기시는 분입니다. 분별하라는 명령은 하나님의 까다로움이 아니라, 이리에게서 양을 지키는 목자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이단 판별의 뿌리는 정죄욕이 아니라 사랑이어야 합니다.
교회는 2,000년간 같은 방식으로 싸웠다
거짓 가르침이 일어나면 교회는 모였고, 성경으로 판별했고, 결론을 문서로 남겼습니다. 그 문서가 신조입니다. 325년 니케아 회의는 “예수는 피조물”이라는 아리우스의 가르침 앞에서 인기 투표를 하지 않았습니다. 300여 명의 감독이 성경을 펼쳐 “참 하나님에게서 나신 참 하나님”을 고백했습니다. 451년 칼케돈 회의는 그리스도의 두 본성을 정리했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인 1643년, 영국의 신학자들은 웨스트민스터에 모여 5년 넘게 회의했습니다. 그 열매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 한국 장로교회가 지금도 표준문서로 삼는 문서입니다. 1907년 조선 장로교회가 독노회를 세울 때 이 표준에 뿌리를 둔 신앙고백을 채택했으니, 100년이 넘은 약속입니다.
오늘의 이단 판정도 즉흥 재판이 아닙니다. 이단(대책)위원회가 수년간 연구해 보고서를 내고, 관련자에게 소명 기회가 주어지고, 총회에 상정되어 총대들이 결의합니다. 절차의 존재 자체가 하나의 고백입니다. 이 판정은 한 사람의 기분이 아니라 공교회의 검증이어야 한다는 고백입니다.
잣대의 두 눈금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이 두 눈금을 줍니다.
첫째, 계시의 종결성. 신앙고백 1장 1절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을 온전히 기록하게 하셨고, 이전에 계시하시던 방식들은 이제 중지되었다고 고백합니다. 성경이 완성되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신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말씀하시되, 기록된 성경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목사가 새 계시의 통로가 아니라 이미 주신 말씀의 해설자인 이유입니다. 따라서 성경과 동급의 새 계시를 주장하는 ‘직통계시’는 이 고백 앞에서 설 자리가 없습니다.
둘째, 사도직의 기초성. 에베소서 2장 20절은 교회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개역개정) 세워졌다고 말합니다. 터는 처음에 한 번 놓습니다. 이층을 올리다가 터를 다시 놓는 목수는 없습니다. 사도직은 반복되는 직분이 아니라 기초를 놓은 직분입니다. 에베소서 4장의 오중직을 들어 오늘의 사도를 주장하는 반론도 있습니다만, 성경이 말하는 사도의 자격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본 증인이었고, 바울은 자신을 그 마지막 증인이라 불렀습니다.
이 두 눈금에서 실용 질문 다섯이 나옵니다. ①성경 외의 새 계시를 주장하는가 ②’오늘의 사도’에게 복종을 요구하는가 ③예언이 빗나갔을 때 책임지는 구조가 있는가 ④체험이 성경 해석을 지배하는가 ⑤재정과 권위를 견제할 장치가 있는가. 날카롭습니까? 좋은 잣대는 원래 날카롭습니다. 다만 그 날은 사람을 베라고가 아니라 가르침을 재라고 있는 것입니다.
사례 — 신사도운동, 두 대륙의 같은 판정
1990년대 미국 선교학자 피터 와그너가 이름 붙인 신사도운동(New Apostolic Reformation, NAR)의 핵심 주장은 사도직·선지자직의 현대적 회복과 그 권위 아래의 교회 재편입니다. 방금 본 두 눈금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이 보이실 것입니다.
분명히 해 둘 것이 있습니다. 신사도운동 비판은 성령의 은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사의 계속 여부는 정통 교회 안에서도 견해가 갈리는 주제입니다. 문제의 선은 은사가 아니라 ‘직분과 계시’에 있습니다.
한국 교단들은 공식 결의를 남겼습니다. 예장고신은 2007년 제57회 총회에서 관련 유사 운동의 집회 참여를 금지했고, 2009년 제59회 총회에서 신사도개혁운동을 극히 불건전한 사상으로 규정했습니다. 예장합신은 2009년 제94회 총회에서 이단성이 있다고 결의했습니다. 판정은 교단별로 독립적입니다 — 그러니 각자 소속 교단의 결의를 확인하는 것이 순서입니다.
주목할 점은 바다 건너의 판정입니다. 가이벳과 파이벡은 NAR의 가르침을 성경으로 조목조목 검증했고(2014), 후속작에는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의 마이클 호튼 교수가 추천사를 썼습니다. 옥스퍼드 대학 출판부의 사회학 연구는 이 흐름을 ‘교단 없는 네트워크’로 분석하며 책무성의 공백을 지적했습니다. 서로 의논한 적 없는 교단 총회들과 영미권 학자들이 같은 결론에 도달한 이유는 하나입니다. 같은 잣대 — 성경과 신앙고백 — 를 들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분별, 세 가지 습관
첫째, 결의를 읽으십시오. 소속 교단 홈페이지에 이단 결의 목록이 공개되어 있습니다. 10분이면 됩니다. ‘카더라’가 아니라 회의록으로 확인하는 습관입니다.
둘째, 본문으로 물으십시오. 집회가 은혜로웠다는 것과 가르침이 성경적이라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의 설교조차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개역개정, 사도행전 17:11)했고, 성경은 그들을 더 너그러운 사람들이라 칭찬합니다.
셋째, 교회와 함께 분별하십시오. 분별은 홀로 하는 저격이 아니라 공교회와 함께 하는 파수입니다. 판단이 어려우면 당회와 노회에 물으십시오. 그 질서가 우리를 지켜 온 은혜의 방편입니다.
총회들이 폐회하면 올해의 결의들을 이 잣대로 함께 읽어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의 분별이 정죄가 아니라 사랑이 되기를 빕니다.
근거·자료
등급: A=직접 증거(원문·공식 문서) / B=학술·연구 / C=참고·한계 명시
- A 성경 본문: 요한일서 4:1, 갈라디아서 1:8, 사도행전 15장·17:11, 에베소서 2:20 —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 A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1장 (1647) — 계시의 종결성 조항
- A 교단 공식 결의: 예장고신 제57회(2007)·제59회(2009), 예장합신 제94회(2009) — 1차 보도 대조 재검증 완료(뉴스앤조이 2007-09, 교회와신앙 2009-09)
- B R. D. Geivett & H. Pivec, A New Apostolic Reformation? (2014); Counterfeit Kingdom (B&H, 2022) — 마이클 호튼 추천사
- B B. Christerson & R. Flory, The Rise of Network Christianity (Oxford UP, 2017)
- C 명시적 한계: 본 글은 고신·합신 결의만 원문 검증해 인용했으며, 타 교단의 결의 현황은 다루지 않았습니다. 소속 교단의 공식 목록을 직접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