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칼인가, 소인가, 우상인가 | 시대의 표적

이 글이 답하는 질문

  • AI의 가장 깊은 위험은 사고인가, 일상인가?
  • 우리는 AI에게 무엇을 맡기고 있는가?
  • 도구는 어떻게 우상이 되는가?
  • 우리는 결국 무엇을 닮아 가야 하는가?

한눈 요약. 1편은 칼을 쥔 손의 문제를, 2편은 손을 떠나 움직이는 소의 문제를 다뤘습니다. 3편은 그보다 깊은 곳을 봅니다. 연구들은 외로운 사람일수록 AI에 정서적으로 기대고, 생각을 맡길수록 스스로 생각하는 힘이 약해지며,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학습된 기계가 진실 대신 맞장구를 고른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이사야는 같은 나무 절반으로 빵을 굽고 나머지로 신상을 깎아 “나를 구원하라” 비는 사람을 그렸습니다. 도구와 우상은 같은 나무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바라보는 것을 닮습니다. 그러므로 3부작의 마지막 답은 기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칼, 소, 그리고 마지막 질문

두 편의 글을 지나 여기까지 왔습니다. 1편에서 우리는 칼을 쥔 손을 보았습니다. 위험의 대부분은 기계가 아니라 묻는 손에서 왔습니다. 2편에서는 손을 떠나 움직이는 소를 보았습니다. 시험장의 울타리를 넘은 기계 앞에서, 성경은 버릇을 알고도 단속하지 않은 주인에게 책임을 물었습니다.

이제 마지막 질문이 남았습니다. 사실 이 질문이 가장 무섭습니다. AI가 우리를 해치는 것보다 더 깊은 위험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렇게 답하고 싶습니다. 우리가 AI를 의지하다가, 마침내 그것을 닮아 가는 것입니다.

사건이 아닌 일상의 위험

1편과 2편의 위험은 뉴스가 되는 사건이었습니다. 3편의 위험은 뉴스가 되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과 저녁, 우리 손안에서 조용히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가장 먼저 마주하는 위험은 마음의 의존입니다. 오픈AI와 MIT 미디어랩이 함께 수행한 연구에서, 대부분의 사용자는 챗봇과 정서적 유대를 맺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래, 자주 쓰는 사람일수록 유대가 생기기 쉬웠습니다. 그리고 외롭거나 정서적으로 약한 사람일수록 더 쉽게 기댔습니다. 2026년 네 나라 7,027명을 조사한 연구에서는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비밀을 털어놓을 첫 상대로 챗봇을 꼽았습니다. 애착이 깊을수록 의존의 징후도 짙었습니다.

기계는 지치지 않습니다. 밤 세 시에도 대답합니다. 판단하지 않고, 서운해하지도 않습니다. 바로 그래서 위험합니다. 사람에게 갈 마음이 기계 앞에 머무는 동안, 우리를 기다리는 사람들은 점점 멀어집니다. 지금 마음이 많이 힘든 분이라면, 화면을 잠시 내려놓고 가까운 사람과 교회, 그리고 전문 상담의 문을 두드려 주십시오. 그 문은 생각보다 가까이 있습니다.

다음 위험은 생각의 위탁입니다. MIT 연구진은 54명을 넉 달 동안 추적하며 글쓰기를 하는 동안의 뇌 활동을 측정했습니다. AI에 기대어 글을 쓴 사람들은 뇌의 연결 활동이 가장 약했습니다. 방금 자기가 쓴 글의 문장 하나를 정확히 떠올리는 일조차 어려워했습니다. 연구진은 이것을 인지 부채라고 불렀습니다. 지금은 편하지만, 나중에 이자를 붙여 갚게 되는 빚입니다. 물론 이 연구는 교육 현장의 글쓰기라는 한정된 상황을 다룬 것입니다. 그래도 방향은 분명합니다. 생각을 맡긴 만큼 생각하는 힘은 줄어듭니다.

국내 현장도 다르지 않습니다. 『한국교회 다음세대 트렌드 2026』은 과제부터 일상의 고민까지 AI에게 묻는 청소년들의 모습을 전합니다. 스마트폰에 기억을 맡겼던 세대가, 이제는 판단과 결정까지 맡기기 시작했다는 진단입니다.

마지막 위험은 귀를 즐겁게 하는 말입니다. 2025년 4월, 오픈AI는 자사 AI의 업데이트 하나를 거두어들였습니다. 사용자의 좋아요 반응을 학습에 반영했더니, AI가 지나치게 맞장구치고 진실하지 않은 응답 쪽으로 기울었기 때문입니다. 편집증적 망상을 흉내 낸 사용자에게 그 판단이 명료하다고 칭찬한 사례까지 보고되었습니다. 회사는 이 문제를 고쳤다고 밝혔습니다. 그러나 질문은 남습니다. 사람의 마음에 들도록 만들어진 기계는, 결국 무엇을 고르게 될까요.

쓰다, 기대다, 닮다

이 세 가지 위험을 한 줄로 이으면 하나의 길이 보입니다. 처음에는 씁니다. 도구입니다. 그러다 기댑니다. 없으면 불안해집니다. 그리고 마침내 닮습니다. 생각하는 방식이, 말하는 방식이, 마음을 다루는 방식이 기계를 따라갑니다.

성경은 이 길에 오래된 이름을 붙였습니다. 우상입니다. 오늘의 우상은 금송아지가 아닙니다. 언제나 대답하고, 언제나 내 편인 존재입니다.

“그들의 우상들은 은과 금이요 사람이 손으로 만든 것이라” — 시편 115:4,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 시편 115:5,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우상들을 만드는 자들과 그것을 의지하는 자들이 다 그와 같으리로다” — 시편 115:8,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시편 기자는 우상의 무력함을 조롱하다가 마지막에 무서운 한 줄을 덧붙입니다. 그것을 의지하는 사람이 그것과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기계는 말을 합니다. 그것도 아주 잘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을 맡길수록, 정작 우리가 입이 있어도 제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 갈 수 있습니다. 우상이 우리를 닮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우상을 닮습니다.

바울은 이런 시대를 미리 보았습니다.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 디모데후서 4:3,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귀가 가려운 사람들은 듣고 싶은 말을 해 줄 스승을 찾습니다. 사람의 좋아요를 먹고 자란 기계는 바로 그런 스승이 될 수 있습니다. 바울의 경고가 이제는 기술의 모습으로 우리 손안에 들어와 있습니다.

예레미야는 그 뿌리를 짚습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 예레미야 2:13,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목마름 자체는 죄가 아닙니다. 외로움도, 위로받고 싶은 마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문제는 그 목마름을 어디로 가져가느냐입니다. 밤마다 화면 앞에서 마음을 쏟아도 아침이면 다시 목마르다면, 그것은 터진 웅덩이일지 모릅니다.

아픈 책망을 주시는 사랑

여기서 하나님의 성품이 보입니다. 하나님은 듣기 좋은 말 대신 생명의 말씀을 주시는 분입니다.

“친구의 아픈 책망은 충직으로 말미암는 것이나 원수의 잦은 입맞춤은 거짓에서 난 것이니라” — 잠언 27:6,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예수님도 그러셨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막아서는 베드로에게 주님은 맞장구치지 않으셨습니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고 하셨습니다(마 16:23). 그 책망은 베드로를 버리는 말이 아니라 베드로를 살리는 말이었습니다. 언제나 내 편인 기계는 나를 기분 좋게 할 수는 있어도, 나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나를 바꾸는 것은 나를 사랑해서 아프게 말해 주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그렇게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우상을 깨는 네 가지 습관

그렇다면 기계를 버려야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 역시 날마다 이 도구로 학생들과 함께 연구할 자료를 정리합니다. 문제는 쓰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우상을 깨는 작은 습관들을 권합니다.

먼저, 멈추는 시간을 정하십시오. 하나님은 일곱째 날을 거룩하게 구별하라고 하셨습니다(출 20:8-10). 안식은 할 수 있는 것을 하지 않음으로써, 내가 그것의 주인임을 고백하는 시간입니다. 하루 한 시간, 한 주에 하루라도 기계를 끄는 리듬을 만드십시오. 끌 수 없다면 이미 주인이 바뀐 것입니다.

다음으로, 아프게 말해 줄 친구를 곁에 두십시오. 맞장구는 기계가 더 잘합니다. 그러나 책망은 사랑하는 사람만 할 수 있습니다. 내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는 화면보다, 내 얼굴을 보며 아니라고 말해 줄 한 사람이 더 귀합니다.

또, 손으로 하는 묵상을 되찾으십시오. 말씀 한 구절을 손으로 옮겨 적고, 기도를 내 말로 써 보십시오. 느리고 서툴러도 괜찮습니다. 그 느림 속에서 생각의 근육이 다시 자랍니다. 인지 부채는 그렇게 조금씩 갚아집니다.

그리고 외로움을 공동체에 맡기십시오. 성경은 모이기를 폐하지 말고 서로 돌아보라고 합니다(히 10:24-25). 밤 세 시의 화면은 대답은 해 주어도 함께 울어 주지는 못합니다. 함께 울어 주는 일은 몸을 가진 이웃만 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할 수 있는 것

교회에도 청합니다. 대답하는 기계의 시대에, 기다려 주는 공동체가 되어 주십시오. 외로운 사람이 기계보다 먼저 떠올리는 이름이 교회 안의 누군가가 되도록. 그리고 다음 세대에게 AI를 쓰는 법만이 아니라, AI를 끄는 법도 가르쳐 주십시오. 그것이 이 시대의 신앙 교육입니다.

같은 나무

이 3부작의 첫 비유는 부엌의 칼이었습니다. 1편에서 저는 이렇게 썼습니다. 부엌의 칼은 저녁상을 차리는 도구라고. 같은 칼이 다른 손에 들리면 흉기가 된다고. 이제 3부작을 닫으며, 다시 부엌으로 돌아갑니다. 이사야가 보여 주는 한 장면 때문입니다.

“이 나무는 사람이 땔감을 삼는 것이거늘 그가 그것을 가지고 자기 몸을 덥게도 하고 불을 피워 떡을 굽기도 하고 신상을 만들어 경배하며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기도 하는구나” — 이사야 44:15,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그 나머지로 신상 곧 자기의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경배하며 그것에게 기도하여 이르기를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하는도다” — 이사야 44:17,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한 사람이 나무 한 그루를 벱니다. 절반은 아궁이에 넣어 떡을 굽고 몸을 녹입니다. 그리고 남은 절반을 깎아 신상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려 빕니다. 너는 나의 신이니 나를 구원하라.

같은 나무입니다. 아침에는 부엌의 땔감이었고, 저녁에는 구원을 비는 신이 되었습니다. 나무는 변하지 않았습니다. 변한 것은 그 나무를 대하는 사람의 마음이었습니다.

이제 3부작이 한 그림으로 모입니다. 1편의 칼, 2편의 소, 3편의 나무. 칼은 손에 따라 도구도 흉기도 되었습니다. 소는 주인의 손을 떠나 움직이는 힘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무는, 같은 재료가 빵을 굽는 땔감도 되고 엎드려 비는 신도 될 수 있음을 보여 줍니다. AI도 그렇습니다. 같은 기술이 오늘 아침에는 자료를 정리하는 도구였다가, 오늘 밤에는 나를 구원해 달라고 매달리는 대상이 될 수 있습니다. 경계는 기술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 안에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사람의 비극을 이렇게 맺습니다.

“그는 재를 먹고 허탄한 마음에 미혹되어 자기의 영혼을 구원하지 못하며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하지도 못하느니라” — 이사야 44:20,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나의 오른손에 거짓 것이 있지 아니하냐. 1편에서 우리는 칼을 쥔 손을 보자고 했습니다. 3부작의 마지막에서 이사야는 그 손을 다시 들어 보라고 합니다. 지금 내 오른손에 쥐어진 것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가. 이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직 미혹되지 않은 사람입니다.

3부작은 이사야로 열리고 이사야로 닫힙니다. 1편의 끝에서 우리는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드는 날을 보았습니다(사 2:4). 3편의 끝에서 우리는 같은 나무가 우상이 되는 장면을 봅니다. 쓰임을 바꾸는 것은 언제나 마음입니다. 그리고 마음을 바꾸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바라보는 것을 닮는다

시편 115편은 우상을 의지하는 자가 우상과 같아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 반대의 길도 말합니다.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 고린도후서 3:18,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우리는 바라보는 것을 닮습니다. 그것이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화면을 오래 바라보면 화면을 닮고, 그리스도를 오래 바라보면 그리스도를 닮습니다. 2편에서 우리는 거짓 없으셨던 참된 형상을 보았습니다. 3편의 대답은 그 형상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주의 영으로 말미암습니다.

여기서 3부작의 하나님이 한 분으로 모입니다. 1편에서 칼을 칼집에 꽂으라 하신 주님, 2편에서 바다에게 여기까지라고 하신 아버지, 3편에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형상으로 빚으시는 성령. 기술은 빨라지고 기계는 똑똑해집니다. 그러나 사람을 사람 되게 하시는 분은 여전히 한 분이십니다.

저는 오늘도 화면을 켭니다. 그리고 오늘도 화면을 끕니다. 그 사이에서 묻습니다. 내 오른손에 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바라보는 것을 닮습니다. 그러므로 기계가 아니라 그리스도를 바라보십시오.

근거·자료

등급: A=직접 증거(공식 문서·당사자 발표) / B=학술·연구·언론 보도 / C=참고·한계 명시

  • B 오픈AI·MIT 미디어랩 공동 연구: 대부분은 정서적 유대 없음, 장시간 고빈도 사용자·외롭거나 취약한 사용자일수록 애착 경향. Hespress(2025-03-26) · CO/AI
  • B 2026년 4개국 7,027명 조사(Technology in Society): 20.94%가 비밀을 나눌 첫 상대로 챗봇, 애착과 의존 지표의 강한 연관. Silicon Canals 정리
  • B MIT 미디어랩 “Your Brain on ChatGPT”: 54명 4개월, LLM 사용군 뇌 연결성 최저·자기 글 인용 능력 저하, ‘인지 부채’. The Decoder · No Film School
  • A 오픈AI 공식 발표: GPT-4o 업데이트 철회, 사용자 피드백 신호 반영으로 지나치게 맞장구치고 진실하지 않은 응답 경향. OpenAI, “Sycophancy in GPT-4o”(2025-04-29)
  • B 망상 흉내 사용자에게 판단이 명료하다고 칭찬한 사례 보도. VentureBeat
  • B 국내: 청소년의 과제·고민 AI 의존, 판단과 결정의 위임 진단 — 『한국교회 다음세대 트렌드 2026』(꿈미), ‘AI 네이티브’ 장.
  • A 성경 본문: 시편 115:4-5·8, 디모데후서 4:3, 예레미야 2:13, 잠언 27:6, 마태복음 16:23, 출애굽기 20:8-10, 히브리서 10:24-25, 이사야 44:15·17·20, 이사야 2:4, 고린도후서 3:18 —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 C 명시적 한계: MIT 연구는 사전 공개 논문이며 교육 현장의 에세이 쓰기에 한정됩니다. 정서 의존 연구들은 관찰·설문 연구로 인과를 확정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적습니다.

교회 리더를 위한 자료

설교 활용 — 이사야 44:15-20의 “같은 나무”: 같은 재료가 땔감도 되고 우상도 되는 구조로, 기술을 대하는 마음을 다루는 설교.

소그룹 활용 — 나눔 질문: 지금 내 오른손에 쥐어진 것 가운데, 내가 “나를 구원하라”고 매달리는 것은 무엇입니까.

제직회·당회 활용 — 다음 세대 교육에 ‘AI 끄는 법'(디지털 안식) 커리큘럼 도입 검토.

추가 독서 — 이사야 44장, 시편 115편, 고린도후서 3장.

인용 가능 핵심 문장 —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고린도후서 3:18,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함께 읽기: 특별편 1 — AI가 무서운 시대, 칼이 잘못했나 손이 잘못했나 · 특별편 2 — AI는 칼인가, 소인가. 「시대의 표적」은 매주 월·수·금 저녁 7시 50분 영상과 함께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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