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개혁 509주년 기념주일 시론
고신 제76회 총회는 손현보 목사의 설교를 ‘참고만’ 할 수 있는가
지중배 (Ph.D. · 킹스톤커뮤니티 대표 · 한국성서대학교 외래교수)
종교개혁 509주년 기념주일(2026-10-25) · 항소심 선고일(2026-10-28) 전 작성
서론 — 이 글이 다루지 않는 것
나는 강단에 선다. 매주 선다. 그리고 매주, 주기도문의 첫 간구를 회중과 함께 드린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이 글은 그 한 줄을 입에 담는 모든 강단을 향해 쓴다. 그 가운데 내 강단이 맨 앞에 있다.
사건은 세 줄이면 충분하다.
2026년 1월 30일, 부산지방법원은 부산 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에게 예배 중 발언 등을 이유로 공직선거법과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 위반의 유죄를 인정해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했고, 피고인과 검찰이 모두 항소했다.1 2026년 9월 16일,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제76회 총회는 그의 설교 네 편에 대한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와 총회 신학부의 연구보고서를 교단의 공식 입장으로 채택하지 않고 참고자료로만 두기로 결의했다.2 항소심 선고는 2026년 10월 28일 오후 2시로 예고되어 있다.3
이 세 줄의 주어는 법원과 총회와 일정이다. 사람이 아니다. 글이 그에 대해 판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먼저 말한다.
먼저 알아 둘 말 몇 가지
이 글에는 교회 바깥의 독자에게, 그리고 교회 안에 있어도 자기 교단의 일이 아니면 낯선 말이 몇 개 나온다. 본문에서도 그때그때 풀어 쓰겠지만, 여섯 개는 미리 적어 둔다. 더 자세한 풀이는 부록 끝의 용어 풀이에 있다.
총회·노회·당회. 장로교회는 회의로 다스려지는 교회다. 한 교회의 회의가 당회이고, 한 지역 교회들의 회의가 노회이며, 교단 전체의 회의가 총회다. 총회는 보통 1년에 한 번 모이고, 그 회차에 번호를 붙인다. “제76회 총회”는 고신 교단의 일흔여섯 번째 연례 총회라는 뜻이다.
고신.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총회. 1930년대 일본이 강요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목회자들이 광복 후 세운 장로교단이다. 이 사건의 교회와, 이 글의 저자가 속한 교단이다.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 고신 교단이 목사를 길러내는 신학교의 교수들이 모인 회의체다. 교단이 신학적 판단을 의뢰하는 곳이다.
‘참고만’. 2025년 9월 제75회 총회는 세 노회의 요청에 따라 그 설교 네 편을 신학적으로 검토해 달라고 교수회와 총회 신학부에 맡겼다. 1년 뒤 보고서가 올라왔다. 제76회 총회는 그 보고서를 교단의 공식 입장으로 받아들일지, 아니면 공식 입장은 아니되 참고할 자료로만 둘지를 표결에 부쳤고, 후자를 택했다. 그래서 교단 안에서는 이 결정을 짧게 ‘참고만’이라 부른다. 이 글의 제목이 거기서 왔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와 대교리문답. 1640년대 영국 웨스트민스터에서 작성된 장로교회의 신앙 문서다. 신앙고백서는 교리를 33개 장으로 서술한 것이고, 대교리문답은 같은 교리를 196개의 문답으로 풀어 쓴 것이다. 고신 교단은 둘 다 헌법의 일부로 채택하고 있다. 그러므로 고신의 목사는 이 문서에 따라 설교하기로 서약한 사람이다.
제3계명. 십계명의 세 번째 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출 20:7). ‘망령되이’는 헛되이, 함부로, 가볍게라는 뜻이다.
유죄와 죄
이제 한 문장을 덧붙여야 한다. 이 글은 유죄를 죄로 읽지 않고, 무죄를 무죄(無罪)로 읽지 않는다.
무슨 뜻인가. 법원이 ‘유죄’라고 할 때, 그것은 피고인이 선거법이라는 나라의 법을 어겼다는 뜻이다. 교회가 ‘죄’라고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어겼다는 뜻이다. 둘은 같은 말이 아니다. 선거법을 어겼어도 계명 앞에서는 깨끗할 수 있고, 선거법에 걸리지 않았어도 계명 앞에서는 죄일 수 있다. 유죄는 법원이 자기 영역에서 선거법으로 내린 결론이고, 죄는 교회가 자기 영역에서 계명으로 내려야 할 결론이다.
앞의 결론은 내려졌고, 뒤의 결론은 아직 내려지지 않았다. 이 글은 앞의 결론을 다투지 않고 뒤의 결론을 묻는다.
그러므로 이 글의 주장은 한 문장이다.
이 사건의 핵심은 선거법이 아니라 제3계명이며, 교회는 그 판단을 법원에 맡겨 두었다.
이 문장을 바르게 읽으려면 알아야 할 것이 넷 있다. 이 글이 어디까지만 다루는지, 왜 한쪽으로 치우쳐 보일 수 있는지, 왜 판결 전에 쓰는지, 그리고 “우리”가 누구인지. 서론의 나머지는 그 넷이다.
한계
이 글이 다루지 않는 것부터 말한다.
법원 판결이 옳은지 그른지를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법원의 일이다. 교단이 그 목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지, 곧 치리 절차를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교단 회의의 일이다. 한 사람의 인격과 속마음을 다루지 않는다. 성경은 “때가 이르기 전에 아무것도 판단하지 말라”고 하면서, 사람의 “마음의 뜻”은 주께서 오실 때 드러난다고 했다(고전 4:5). 어느 정당과 어느 정책이 옳은지를 다루지 않는다. 그것은 시민 각자의 지혜에 맡겨진 것이다.
그렇다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하나다. 강단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썼는가. 그리고 교회는 그 물음에 답했는가. 이 글은 이 둘만 다룬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한 사람을 평가하는 글이 아니다.
보이는 것만 세는 저울
한 가지를 미리 고백해야 공정하다. 제3계명은 두 방향으로 어길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과,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해야 할 때 입을 닫는 것. 뒤의 것도 계명을 어긴 것이라는 점은 1장에서 자세히 보이겠다.
그런데 앞의 것은 눈에 띈다. 보도되고, 기소되고, 보고서가 나온다. 뒤의 것은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는다. 침묵은 뉴스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뉴스로만 판단하면 반드시 한쪽으로 기울어 보인다. 보이는 것만 세는 저울이 공정한 저울인가.
이 비대칭은 짐작이 아니다. 2025년 4월 3일, 헌법재판소 선고 전날,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총회가 주최한 기도회에서 “하나님의 명령으로 윤석열을 탄핵하고”라는 기도가 드려졌고, 그 자리의 설교자는 “당연히 만장일치로 인용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했다.15 같은 주간 다른 쪽 광장에서는 탄핵 기각을 촉구하는 기도회가 열렸다. 두 기도는 같은 계명 앞에 선다. 그러나 한쪽만 기소되었고, 한쪽만 교단 보고서가 나왔다. 이 글은 2장에서 두 기도를 나란히 놓는다.
한국교회 강단 전체가 어느 쪽으로 더 기울었는지, 나는 모른다. 측정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한쪽은 재판받고 다른 쪽은 재판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계명이 두 방향을 같은 무게로 금한다는 사실을 가린다. 이 글은 그 가림을 걷으려 한다. 그러므로 이 글은 한 강단만 보지 않는다.
왜 판결 전에 쓰는가
이 글은 항소심 선고 전에 쓰였다. 선고 뒤에 내면 어느 쪽이든 판결에 대한 반응으로 읽힌다. 유죄가 나오면 유죄에 편승한 글로, 무죄가 나오면 무죄에 불복하는 글로 읽힐 것이다. 선고 전에 낸 글이 선고 뒤에도 한 문장 바꿀 필요가 없다면, 그것이 이 글의 주장에 대한 가장 강한 증명이다. 이 글의 주장이 “판결은 핵심이 아니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말해 둔다. 판결은 이 글의 어떤 문장도 바꾸지 못한다. 사실 오류와 오탈자와 인용 번호는 고친다. 주장과 근거와 적용은 고치지 않는다. 고친 것은 부록에 날짜와 함께 기록한다. 고친 것을 숨기면 판결 때문에 고쳤다는 의심을 부르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한 가지를 청한다. 선고 뒤에 이 글을 다시 읽으라. 글이 바뀌지 않았다면, 바뀐 것은 독자다.
재판에 영향을 주려는 글인가
선고 전에 내는 글은 재판에 영향을 주려는 시도로 읽힐 수 있다. 그런 오해는 “아니다”라는 말로 막히지 않는다. 오해는 글의 구조로 막힌다.
법원은 선거라는 사람 사이의 공적 질서를 다룬다. 이 글은 하나님의 이름을 다룬다. 십계명의 앞부분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뒷부분이 사람과의 관계를 다루는 것에 빗대어 말하면, 법원은 뒷부분의 일을 하고 이 글은 앞부분의 일을 묻는다. 법원이 유죄를 선고해도 이 글은 “교회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고, 무죄를 선고해도 같은 말을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글에는 재판부가 인용할 문장이 없다. 재판부를 향한 문장도 없다. 이 글이 말을 거는 상대는 교회다.
우리
마지막으로 “우리”를 정한다. 이 글의 “우리”는 고신이 아니다. 주기도문의 첫 간구를 드리는 모든 강단이다.
십계명을 오늘의 교회에 그대로 적용하지 않는 교회도 있다. 웨스트민스터 문서를 신조로 갖지 않은 교회는 더 많다. 그러나 주기도문은 거의 모든 교회가 드린다. 그리고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는 제3계명을 기도의 말로 바꾼 것이다. 계명은 교회가 신조로 인정해서 유효한 것이 아니라, 기도가 이미 고백한 것이다. 그 기도를 드리면서 그 이름을 어느 후보에게 묶는 것은, 자기 기도를 자기 설교로 부정하는 일이다.
나는 그 “우리” 안에서 쓴다. 다윗의 죄를 꾸짖었던 선지자 나단의 문장을 쓰되, 꾸짖음을 받는 다윗의 자리에서 쓴다. 손가락은 먼저 나를 가리키고, 그 다음에 남을 가리킨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순서대로, 내 눈의 들보 다음에 형제 눈의 티다(마 7:5).
서론을 다 읽은 독자가 이 글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다면, 서론은 끝난 것이다.
1장 기준 — 참고만 할 수 없는 계명
제3계명은 결과가 아니라 사용을 심판한다. 선거법은 어떤 발언이 유권자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가를 묻는다. 계명은 그 발언이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썼는가를 묻는다. 법원은 영향을 재고, 교회는 사용을 재야 한다. 두 저울은 다르고, 둘 다 필요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둘 중 하나만 작동했다.
112문과 113문은 무엇을 말하는가
고신 총회가 헌법으로 채택한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은 제3계명을 두 문항으로 푼다. 112문은 이 계명이 ‘하라’고 요구하는 것을 말하고, 113문은 ‘하지 말라’고 금하는 것을 말한다.4
112문의 물음은 이렇다. “제3계명이 요구하는 것은 무엇인가.” 답은, 하나님의 이름과 칭호와 속성과 규례와 말씀과 성례와 기도와 맹세와 서원과 제비와 그분의 행사와, 그 밖에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시는 모든 것이, 생각과 묵상과 말과 글에서 거룩하고 경건하게 사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거룩한 고백과 그에 합당한 삶으로써, 하나님의 영광과 우리 자신과 이웃의 유익을 위하여.
풀어 말하면 이렇다. 제3계명이 지키라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단어 하나가 아니다. 하나님이 자기를 알리시는 모든 것이다. 성경 말씀도, 기도도, 설교도, “하나님의 뜻”이라는 표현도 모두 하나님의 이름에 속한다. 그리고 이것들은 입으로 말할 때만이 아니라, 생각하고 묵상하고 글로 쓸 때도 거룩하게 다루어야 한다. 설교 원고가 이 계명 아래 있는 이유다.
113문의 물음은 이렇다. “제3계명이 금하는 죄는 무엇인가.” 답의 첫 줄이 놀랍다. 하나님의 이름을 “요구된 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 입을 더럽히는 것이 아니라 입을 닫는 것이 금지 목록의 맨 앞에 있다. 그 다음에 긴 목록이 이어진다. 하나님의 이름을 무지하고 헛되고 불경하고 미신적이고 사악하게 사용하는 것. 그리고 그 목록 안에 이 글에 꼭 필요한 세 구절이 있다.
하나는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에 대해 불평하고 다투고 호기심으로 캐묻고 잘못 적용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일(섭리)을 자기 편의대로 해석해서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여기 속한다.
또 하나는 “말씀이나 그 어느 부분을 곡해하고 잘못 적용하고 어떤 방식으로든 왜곡하는 것”이다. 성경 구절을 본래 뜻과 다르게 가져다 쓰는 것이 여기 속한다. 설교의 문제가 제3계명의 문제가 되는 자리가 바로 여기다.
마지막은 “위선으로, 또는 사악한 목적을 위해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다. 신앙의 언어를 신앙이 아닌 목적에 쓰는 것이다.
나는 이 문항을 읽다가 멈췄다. 금지 목록이 너무 길어서가 아니었다. 그 목록의 첫 줄 때문이었다. 사용하지 않는 것. 계명은 입을 더럽히는 것보다 먼저 입을 닫는 것을 꾸짖고 있었다.
오용과 불용
그래서 113문의 구조는 대칭이다. 요구된 대로 사용하지 않음(불용)과 잘못 사용함(오용)이 같은 문장 안에, 같은 접속사로 묶여 있다. 하나님의 이름을 어느 후보에게 붙인 강단과, 성경이 죄라 부른 것을 두려워서 죄라 부르지 못한 강단은, 같은 계명 앞에 선다. 앞의 것은 눈에 띄고, 뒤의 것은 띄지 않는다. 계명은 둘을 구별하지 않는다.
이 대칭이 이 글의 공정성을 지킨다. 이 글이 한쪽 강단만 겨눈다면 글 자체가 113문을 어기는 것이 된다. 어느 쪽 강단이 더 많은지 묻는다면, 답은 “모른다”이다. 다만 한쪽만 재판받는다는 사실이 이 대칭을 가린다는 것은 안다.
에스겔의 세 계산법
예언서는 이 대칭을 더 날카롭게 만든다. 에스겔 33장은 파수꾼을 말한다. 옛날 성읍에는 성벽 위에 파수꾼을 세웠다. 적이 오면 나팔을 불어 알리는 사람이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파수꾼으로 삼았다”고 하시며(겔 33:7), 파수꾼의 책임을 경우마다 나누어 말씀하신다.
파수꾼이 나팔을 불었는데 백성이 듣지 않고 죽었다면, 그 피는 듣지 않은 자에게 돌아가고 파수꾼은 자기 영혼을 건진다(겔 33:4–5). 파수꾼이 나팔을 불지 않아서 백성이 죽었다면, 백성은 자기 죄로 죽되 하나님은 그 피를 파수꾼의 손에서 찾으신다(겔 33:6). 책임이 파수꾼에게 넘어간다는 뜻이다.
그리고 에스겔 13장과 14장은 셋째 경우를 말한다. 평안이 없는데 “평안하다”고 말한 선지자다. 하나님은 그들을 “회칠한 담”에 빗대신다. 금이 간 담을 회로 발라 멀쩡해 보이게 한 것이다. 폭우가 오면 담은 무너지고, 담을 세운 자와 그 담 아래 선 자가 함께 깔린다(겔 13:10–15). 그리고 그런 선지자를 찾아간 백성에 대해 하나님은 “선지자의 죄악과 그에게 묻는 자의 죄악이 같다”고 하신다(겔 14:10).
세 계산법이 나온다. 바른 나팔은 책임을 분리한다. 침묵은 책임을 파수꾼에게 넘긴다. 틀린 나팔은 책임을 합산한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무거운 것은 셋째다. 두 사람 몫을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서 설교의 “영향”이라는 말이 계명 안에서 어떻게 계산되는지 보인다. 세 기준(아래에서 말한다)을 통과한 설교가 누군가의 표를 바꿨다면 에스겔 33:4의 경우이고, 설교자는 깨끗하다. 후보의 이름을 하나님의 뜻으로 선포한 설교가 표를 바꿨다면 에스겔 14:10의 경우이고, 설교자와 투표자가 함께 계산된다. 법원이 영향을 재는 동안 계명은 사용을 재고, 사용의 방식이 영향의 책임이 누구에게 가는지를 정한다.
그렇다면 거짓 나팔을 듣고도 분별한 회중은 어떻게 되는가. 에스겔 14:10의 “묻는 자”는 몇 절 앞에서 “우상을 마음에 두고 선지자에게 나아간 자”로 규정되어 있다(겔 14:7). 거짓 나팔을 듣고도 분별한 사람은 그 계산에서 빠진다. 아니, 빠질 뿐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해 파수꾼의 일을 한 것으로 계산된다. 사도 바울의 설교를 듣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했던 베뢰아 사람들이 그래서 “신사적”이라 불렸다(행 17:11).
고신 안에서 보고서를 쓰고 청원을 올리고 성명을 낸 사람들의 신학적 자리가 여기다. 그들은 공범이 아니다. 경고를 듣고 자기 교단을 향해 나팔을 다시 분 사람들이다. 이 자리를 이름 붙여 두어야 이 논의가 한 사람에 대한 공격이 아니라 분별의 의무에 대한 서술이 된다.
세 기준
113문과 에스겔을 강단의 언어로 옮기면 기준 셋이 나온다. 나는 이것을 기원, 범위, 결속이라 부른다. 셋 다 한 설교를 놓고 물을 수 있는 질문이다.
기원은 “이 적용이 어디서 왔는가”를 묻는다. 성경 본문에서 왔는가, 그 주의 뉴스에서 왔는가. 본문을 펴기 전에 결론이 먼저 있었다면, 본문은 결론을 꾸미는 장식이 된다. 113문의 “말씀을 잘못 적용하는 것”이 이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서 13장을 펴 놓고 “그러므로 이번 선거에서는 이 후보다”로 간다면, 그 결론은 로마서에서 온 것이 아니다. 로마서 13장은 어느 후보도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범위는 “이 말이 모든 쪽에 같은 무게로 떨어지는가”를 묻는다. 내 진영의 인물이 같은 죄를 범했을 때도 같은 강단에서 같은 무게로 말할 것인가. 아니라면 죄를 부른 것이 아니라 진영을 부른 것이다.
결속은 “하나님의 이름이 특정 결과에 묶이는가”를 묻는다. 누가 당선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하는 순간, 하나님의 이름은 그 결과의 성패에 걸린다. 결과가 뒤집히면 하나님의 이름이 패소한다. 113문의 “섭리를 잘못 적용하는 것”이 이것이다.
세 기준은 서로를 받친다. 적용이 본문에서 오면 그 말은 저절로 모든 쪽에 해당하고, 모든 쪽에 해당하는 말에는 묶일 결과가 없다. 하나가 무너지면 셋이 같이 무너진다.
하나님의 이름은 결과에 묶이는 순간 결과와 함께 패소한다.
나단의 수정
여기서 한 가지 오해를 막아야 한다. “본문은 기준을 주지 판정을 주지 않는다”라고만 말하면, 강단이 아무것도 죄라 부르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성경에는 판정이 있다. 다윗이 부하의 아내를 빼앗고 그 부하를 전장에서 죽게 했을 때, 선지자 나단은 다윗을 찾아가 비유를 들려주고 나서 말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삼하 12:7). 판정이다. 그러므로 원칙은 이렇게 다듬어야 한다. 성경이 죄라고 이름 붙인 행위에는 강단도 판정을 내리고, 성경이 사람의 지혜에 맡긴 선택에는 강단이 기준만 준다.
나단의 판정은 세 조건 위에 서 있었다. 이미 저질러진 행위였고, 율법이 분명히 죄로 규정한 행위(살인과 간음)였으며, 행위자 본인에게 직접 한 말이었다. 나단은 백성에게 “다윗을 폐하라”고 하지 않았고, 다음 왕을 지명하지도 않았다. 죄를 이름 붙였지만 왕위를 어떻게 할지는 하나님께 두었다(삼하 12:13–14). 판정과 처분을 분리한 것, 이것이 나단의 모범이다.
그러므로 강단은 거짓말과 탐욕과 간음과 압제를 죄라 불러야 한다. 침묵하면 불용이다. 강단이 말할 수 없는 것은 성경이 이름 붙이지 않은 것에 대한 판정이다. 어느 후보가 더 낫고 어느 정책이 더 지혜로운가. 여기서 판정을 내리면 성경이 주지 않은 권위를 설교자가 만든 것이다.
성경이 죄라 부른 것은 강단도 죄라 부르고, 성경이 침묵한 것은 강단도 침묵하며, 처분은 어느 경우든 하나님께 둔다.
정치인의 죄를 강단에서 부를 때
그렇다면 정치인이 성경이 이름 붙인 죄를 범했을 때, 강단은 그것을 죄라 부를 수 있는가. 부를 수 있다. 다만 조심할 것이 있다. 나단은 하나님께 직접 계시를 받았고, 우리는 받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진 증거의 기준은 “두세 증인”이다. 모세의 율법도(신 19:15), 사도 바울이 장로에 대한 고발을 받는 규칙도(딤전 5:19) 그렇다. 그러므로 조건이 넷 붙는다.
당사자가 공적으로 행했거나 공적으로 인정한 것이어야 한다. 본인의 공개 발언, 본인의 자백, 확정된 법원 판결. 신문 보도 하나는 증인 하나이고, 다투어지고 있는 보도는 증인조차 아니다.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사실에 하나님의 이름을 거는 것은 112문이 말한 “거룩하고 경건한 사용”이 아니다.
양 진영에 같은 무게로 불러야 한다. 앞에서 말한 둘째 질문이다.
말을 듣는 사람은 회중이어야 한다. 나단의 “당신이 그 사람이라”는 죄인 본인에게 한 말이었다. 예배당에 없는 정치인은 말을 듣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적용은 “그는 죄인이다”가 아니라 “우리는 이렇게 하지 말자, 그리고 그를 위해 기도하자”가 된다. 바울은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기도하라고 했다(딤전 2:1–2).
그리고 처분은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를 뽑지 말라”는 말은 다시 지혜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다.
네 조건 중 하나라도 빠지면, 그 강단은 나단이 아니라 언론이다.
이것이 기준이다. 참고할 수 있는 것은 보고서이지 계명이 아니다. 계명은 참고되지 않는다. 지켜지거나 어겨진다.
판정 하나: 그 강단
기준을 세웠으니 대입한다. 기준만 세우고 대입하지 않는 글은 나단의 비유만 말하고 “당신이 그 사람이라”를 말하지 않는 글이다. 그것은 이 장이 입을 닫는 것이라 부른 바로 그것이다.
먼저 네 조건을 본다. 공적으로 행했거나 인정한 것인가. 아래에 인용하는 것은 모두 세계로교회가 유튜브로 공개한 주일 예배 설교이고, 그 가운데 핵심 문장은 본인이 자기 입으로 한 말이다.11 양쪽에 같은 무게인가. 이 글은 저자의 강단에 먼저 같은 기준을 걸었고, 결말에서 서약한다. 말을 듣는 사람이 회중인가. 이 글이 말을 거는 상대는 교회다. 처분은 하나님께 두는가. 이 글은 치리를 말하지 않는다. 넷을 통과했으므로 판정할 수 있다.
먼저 옳은 것을 말한다. 그 강단은 침묵하지 않았다. 성경이 말한 것을 강단이 말해야 한다는 주장은 112문이 요구하는 것이다. 성명을 낸 교단 원로 열두 분도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2026년 9월 20일, 총회가 ‘참고만’을 결의한 지 나흘 뒤 주일, 그 강단은 자기 말을 고쳤다. 2025년 1월 5일 설교의 제목은 “이재명이 죽어야 대한민국이 산다!”였다.13 스무 달 뒤 같은 강단은 “저는 이재명이 죽어야 대한민국이 산다고 외쳤던 사람입니다”라고 인정하고, “나는 이제 이재명이 살아야만이 대한민국이 산다, 이렇게 외치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그가 법을 되돌리고 재판을 받는다면 “용서해 주자, 다시 회복시켜 주자, 사면해라, 저는 그렇게 외칠 용기가 있다”고 했다. 설교 끝에 한 아이가 “이재명도 잘못을 회개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용서해 주실 거라 생각했다”고 답하자, 그는 “이재명은 지가 알아서 할 거고, 니는 니가 느낀 거야, 뭐야”라고 돌려세웠다. 그 순간 말을 듣는 사람은 회중이었고, 처분은 하나님께 있었다. 나단의 자리였다. 이것을 적지 않으면 이 글은 한쪽만 보는 글이 된다.
그러나 같은 설교, 같은 강단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결과에 묶였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떨어진 것을 두고 그는 “내가 몇 주 전에 설교에서도 이야기했잖아, 절대로 오래 못 간다, 내가 하다가 탁 걸리는 거예요”라고 했다. 자기 설교의 예고가 뉴스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두 주 전 설교에서는 “하나님께서 미국의 밴스 부통령을 움직였죠”라고 했고, “트럼프와 밴스는 잠시 나의 반석과 요새가 되었어요”라고 했다.12 그날 본문은 시편 18편이었고, “반석”과 “요새”는 그 시편이 하나님께만 드린 호칭이다(시 18:2). 잠시라도 사람에게 붙였으면 하나님의 것을 사람에게 묶은 것이다. 113문은 이것을 “섭리를 잘못 적용하는 것”이라 부른다.
같은 본문을 한쪽에만 썼다. 열왕기상 22장의 사백 명 선지자는 코로나 때 “대통령 앞에 가서 박수 치고 밥 얻어 먹은” 목사들과 교단의 “어용 교수”들에게 붙었다. 자기 편의 누구에게도 붙지 않았다. 미가야의 자리는 말하지 않아도 자기 것이 되었다.
본문에 없는 것도 말했다. 호르무즈 파병을 하지 않은 것을 두고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도 자격이 없는 거예요”라고 했고, 성교육 자료를 두고 “사탄에게서 나오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했으며, 특정 방송에 대한 후원 중단을 강단에서 촉구했다. 이것들은 성경이 죄라 이름 붙이지 않은 정책과 분쟁이다. 지혜의 영역이다. 거기에 사탄과 하나님의 이름이 붙었다.
그리고 두 설교 모두에서 강단은 자기 재판과 자기 언론 분쟁의 변론대가 되었다. 2장에서 말할 원칙을 미리 당겨 쓰면 이렇다. 자기 이름으로만 서야 할 법정의 사건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는 강단의 내용이 되었다.
한 가지를 더 적어야 한다. 그는 “난 하나님의 음성을 12번을 들었어, 진짜 귀에 들립니다”라고 했다. 이 글은 그 주장을 평가하지 않는다. 한계 밖이다. 다만 이 글이 세운 조건은 그 주장에도 같이 적용된다. 나단의 판정은 두세 증인 없이도 섰지만, 그것은 나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두세 증인의 입으로”(신 19:15)이고, 음성을 들었다는 말은 증인이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판정한다.
손현보 목사, 당신이 그 사람이라.
침묵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옳았다. 하나님의 이름을 한 사람의 승패에 묶었기 때문이다. 시편이 하나님께만 드린 이름을 정치인에게 잠시 빌려주었기 때문이다. 사백 명의 선지자를 상대편에게만 붙이고 자기 편에는 한 번도 붙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이 113문이 금한 것이다. 한 설교 안에 나단의 문장과 사백 선지자의 문장이 함께 있었고, 뒤의 문장이 있는 한 앞의 문장은 그것을 덮지 못한다.
처분은 쓰지 않는다. 나단도 쓰지 않았다. 그것은 총회의 일이다.
2장 권한과 한계 — 총회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교회 회의는 교회의 일만 다룬다. 그러나 교회의 일은 반드시 다룬다. 이 두 문장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31장의 요지다. 그리고 이번 사건에서 교회가 둘 중 어느 것도 지키지 못한 이유가 2장의 내용이다.
31장 세 조항
신앙고백서 31장의 제목은 “대회와 공의회에 관하여”다. 교회 회의, 곧 오늘의 노회와 총회에 관한 장이다. 이 장이 무엇을 할 수 있고 무엇을 할 수 없는지를 정해 둔다.
판본부터 밝혀야 한다. 1647년 원본 31장은 다섯 항이고, 1788년 미국 장로교회가 고친 판본은 국가 위정자가 교회 회의를 소집할 수 있다는 원본 31.2를 삭제해 넷으로 줄였다. 그래서 같은 조항이 원본에서는 31.3·31.4·31.5이고 미국본에서는 31.2·31.3·31.4다. 고신 안에서는 원본 번호가 통용되는 것으로 보이지만(부록 4) 헌법 조문으로 확인하지는 못했으므로, 이 글은 둘을 나란히 적는다. 조항 번호는 글의 논지를 바꾸지 않는다.5
원본 31.3(미국본 31.2)은 회의의 권한을 말한다. 교회 회의는 신앙에 관한 논쟁과 양심의 문제를 말씀에 따라 결정하고, 공예배와 교회 운영의 규칙을 정하며, 잘못된 행정에 대한 고소를 받아 판단한다. 그리고 그 결정은 “하나님의 말씀에 합치하면” 경외와 복종으로 받아야 한다. 말씀에 합치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그 결정을 내린 권세가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원본 31.4(미국본 31.3)는 회의의 한계를 말한다. 사도 시대 이후의 모든 회의는 오류를 범할 수 있고, 실제로 많은 회의가 오류를 범했다. 그러므로 회의의 결정은 신앙과 실천의 “규칙”이 아니라, 둘을 위한 “도움”으로 쓰여야 한다. 규칙은 성경뿐이다.
원본 31.5(미국본 31.4)는 회의의 영역을 말한다. 회의는 교회에 관한 것 외에는 다루거나 결론 내리지 않으며, 나라에 관한 시민적 사안에는 간섭하지 않는다. 비상한 경우에 겸손하게 청원하는 것과, 국가가 조언을 구할 때 답하는 것만 예외다.
세 조항을 한 줄로 묶으면 이렇다. 회의는 교회의 일을 결정할 권한이 있고, 그 결정은 틀릴 수 있으며, 나라의 일에는 손대지 않는다.
이 사건에서 교회의 일은 무엇이고 나라의 일은 무엇인가. 설교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어떻게 썼는가는 교회의 일이다. 그 발언이 선거법을 어겼는가는 나라의 일이다. 앞의 것은 총회의 영역이고 뒤의 것은 법원의 영역이다. 그런데 법원은 자기 영역을 다루었고, 총회는 자기 영역을 다루지 않았다. 31.5가 법원의 영역을 존중하라고 한 것은, 교회가 자기 영역을 비워 두어도 된다는 뜻이 아니었다.
세 사건의 곡선
고신 교단은 자기 영역을 지킨 기억으로 태어났다. 신사참배 거부다. 일제가 교회에 신사 참배를 강요했을 때, 그것은 국가가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것으로 요구한 일이었다. 많은 교회가 넘겨주었다. 넘겨주지 않고 옥에 갇혔던 사람들이 광복 후 고신이 되었다. 제3계명을 지킨 사례다.
그 거부의 형식을 기억해야 한다. 총독부에 정책을 바꾸라고 요구한 집회가 아니었다. 각자 절하지 않은 무릎이었다. 이 형식의 차이가 왜 중요한지는 뒤의 “증언과 동원”에서 말한다.
두 번째 사건은 코로나였다. 국가가 감염병을 이유로 예배의 형식을 제한했다. 하나님의 이름을 요구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이것은 31.5가 말한 “겸손한 청원”으로 대응할 일이었다. 그런데 교회 일부가 이것을 신사참배와 같은 급으로 올렸다. 제3계명의 문제가 아닌 것을 제3계명의 문제로 만든 것이다. 범주를 잘못 짚은 과잉이었다.
세 번째 사건이 이번이다. 이번에는 국가가 아니라 강단이 하나님의 이름을 후보에게 붙였다. 제3계명을 어긴 주체가 교회 밖에서 안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교회는 이것을 다시 종교 자유의 틀, 곧 신사참배의 틀로 읽었다. 밖에서 온 요구에 저항하던 언어로, 안에서 일어난 사용을 변호한 것이다. 뒤집힘이다.
세 사건은 하나님의 요구가 바뀐 역사가 아니다. 요구는 하나였다. 하나님의 이름을 국가에도, 자기 진영에도 빌려주지 말라. 바뀐 것은 교회의 분별이다. 지킴에서 과잉으로, 과잉에서 뒤집힘으로. 역사의 곡선은 아래를 향하고 있다.
신사참배를 거부한 교단이 신사참배의 언어로 자기 강단을 변호할 때, 거부의 기억은 거부의 반대편에서 쓰인다.
증언과 동원
그렇다면 교회가 국가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인가. 다니엘 3장이 형식을 준다. 바벨론 왕이 금 신상에 절하라고 명령했을 때 세 유대 청년은 답했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건져내실 것이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우리는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7–18). 문장의 주어는 “우리”이고, 듣는 사람은 명령한 왕이며, 그 말의 대가는 말한 사람이 치렀다. 풀무불이었다. 이것이 증언이다.
동원은 반대다. 주어가 “너희”로 바뀐다. “너희는 하라.” 듣는 사람은 결정권자나 회중이 되고, 대가는 남이 치른다. 헌법재판소를 향해 특정 결론을 내라고 요구하는 집회는 “너희는 하라”의 형식이다.
이 형식은 어느 한쪽의 것이 아니다. 2025년 봄, 한쪽 광장에서는 “탄핵 기각”을, 다른 쪽 광장에서는 “탄핵 인용”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요구했다. 선고 전날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 총회가 주최한 기도회에서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윤석열을 탄핵하고 …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실현되도록” 기도했고, 설교자는 “당연히 만장일치로 인용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했으며, 총회 총무는 다음 날이 “하나님께서 기도에 응답해 주심을 체험하는 놀라운 역사”가 될 것이라 했다.15 결과를 하나님의 명령이라 부르고, 결과가 나오면 기도의 응답이라 부를 준비를 한 것이다. 이것은 “이재명이 죽어야 대한민국이 산다”와 방향만 다를 뿐 같은 문장이다. 그리고 교단 총회가 헌법재판소에 결론을 요구한 것은 31.5가 교회 회의에 금한 바로 그 일이다. 이것은 판정이 아니라 조항의 적용이다. 조항은 누구에게나 같은 것을 말한다. 판정은 그 교단의 다음 총회가 할 일이고, 이 글은 그 교단의 사람이 아니다. 이 글의 기준은 두 광장에 같은 것을 요구한다. 다만 이 글은 그 기도회의 사람들을 판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고, 이 글이 말을 거는 교단의 사람도 아니다. 이 글은 그 문장이 같은 문장이라는 것만 적는다. 같은 문장을 한쪽에서만 읽으면 이 글도 사백 명 쪽에 선다.
사람 숫자는 기준이 아니다. 오순절에 믿은 사람도 삼천 명이었고(행 2:41), 풀무불 앞에는 세 사람이었다. 수만 명이 모여도 “우리는 못 한다”면 증언이고, 세 명이 모여도 “너희는 하라”면 동원이다. 판별은 한 줄이다. 내가 치르는 문장인가, 남이 치르는 문장인가.
이 기준은 재판정에도 적용된다. 예수님은 빌라도 앞에서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6)라고 자기 나라의 성격만 말씀하셨고,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지 않으셨다. 반면 바울은 로마 시민권을 들어 황제에게 상소했다(행 25:11). 그러므로 항소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차이는 상소의 내용이다. 바울은 자기 사건을 변론했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재판부를 정죄하지 않았다. 유죄를 받은 설교자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변론은 하나님의 이름 없이 자기 이름으로만 법정에 서는 것이다. 그래야 재판의 결과가 어떻든 하나님의 이름이 패소하지 않는다.
십자가가 이 형식의 끝이다. 주님이 십자가에서 하신 일곱 말씀 가운데 빌라도와 군중과 관원을 향한 “너희는 하라”는 하나도 없다. 사람을 향한 유일한 말은 어머니를 제자에게 맡기신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요 19:26)이고, 자기 재판의 결과와 아무 관계가 없는 돌봄이다. 그리고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는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위한’ 기도이지 그들에 ‘대항하는’ 기도가 아니다. 벌을 내릴지 말지는 아버지께 두고, 아버지께 구한 내용은 자비였다. 베드로가 이것을 풀어 썼다. 주님은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23).
불의한 재판 아래서 하나님의 이름은 재판관을 ‘위해’ 쓰일 수 있고, 재판관을 ‘향해’ 쓰일 수는 없다.
청원과 기도
그렇다면 교회가 여럿이 함께 국가에 대해 취할 수 있는 정당한 형식은 무엇인가. 둘이다. 31.5가 말한 “겸손한 청원”과, 31장이 근거 구절로 드는 “모든 권세자를 위한 기도”(딤전 2:1–2)다. 청원은 요구하되 하나님의 이름을 결과에 묶지 않는다. 기도는 결과를 하나님께 맡긴다. 집회가 이 둘을 벗어나 특정 결과를 하나님의 뜻으로 선포하는 순간, 증언은 동원이 된다.
그리고 교회 회의가 자기 영역을 비운 채 국가 영역으로 말을 보낼 때, 그 말은 청원도 기도도 아니다. 그것은 자기 집을 비우고 남의 집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31.5는 교회가 남의 집에 들어가지 말라고 했고, 31.3은 교회가 자기 집을 지키라고 했다. 이번 총회는 둘 중 어느 것도 하지 않았다. 남의 집에 들어가지도 않았고, 자기 집도 지키지 않았다. 그것이 ‘참고만’이다.
3장 결론의 의무 — 성령과 우리
사도행전 15장은 결론 없는 평화를 알지 못한다. 안디옥 교회와 예루살렘 교회는 의견이 갈린 채로 시작했고, 하나됨은 두 교회가 적당히 타협해서가 아니라 성경에 근거해 결론을 내린 회의에서 회복되었다. 그 회의의 순서가 교회 회의의 본이고, 그 순서의 어느 지점에서 이번 총회가 멈췄는지가 3장의 내용이다.
예루살렘 회의의 여섯 단계
배경부터 보자. 초대교회에 이방인이 들어오자 “이방인도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는다”고 가르치는 사람들이 생겼다(행 15:1).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에 보내 사도와 장로들에게 묻게 했다. 그렇게 열린 것이 예루살렘 회의다.
회의는 이렇게 진행됐다. 먼저 많은 변론이 있었다(행 15:7). 그 다음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의 보고를 들었다(행 15:12). 야고보가 일어나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일치하도다” 하며 아모스서를 인용했다(행 15:15–17, 암 9:11–12). 그리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행 15:19). 판단은 편지가 되었고(행 15:23), 편지는 안디옥으로 보내졌다(행 15:30). 변론, 경청, 성경, 판단, 문서, 전달. 여섯 단계다.
이 순서에서 두 가지를 봐야 한다. 논쟁은 성경 인용 앞에 있고, 복종은 문서화 뒤에 있다. 논쟁을 끝내는 것은 표결이 아니라 성경이 말하는 순간이다. 그리고 편지에 적힌 “성령과 우리는”(행 15:28)이라는 말이 가능했던 이유는 투표 때문이 아니라 성경이 근거였기 때문이다. 성경 없이 다수결만 있었다면 “우리”만 있고 “성령”은 없다.
‘참고만’이 멈춘 지점
제76회 총회에도 변론이 있었다. 찬반 토론이 있었고 당사자의 발언도 있었다. 경청도 있었다. 연구보고서는 세 노회의 청원으로 1년의 연구를 거쳐 교수회 전원의 동의로 작성되었고, 총회 신학부의 검토를 거쳐 보고되었다.6 보고서의 결론은 네 편의 설교가 “내용, 방식, 목적 전반에 걸쳐 고신 총회가 채택한 신앙고백 문서의 설교 이해와 구조적으로 충돌한다”는 것이었다.7 거기까지는 사도행전 15:12, 곧 보고를 듣는 단계다.
그 다음이 없었다. 성경을 인용하고 판단하는 단계(행 15:15–19)로 가는 대신, 보고서를 채택할지 말지는 아예 표결에 부쳐지지 않았다. 한 총대가 제안했다. “결의가 되는 순간 정치의 좌우로 해석될 가능성이 너무 크다. 가부를 묻지 말고 참고로 받아 달라.” 당사자가 단상에 올라 신상 발언을 했고, 총대들이 박수를 보냈다. 그리고 “참고만 하기로 한다”는 수정안만 표결에 부쳐져 350표 중 281표로 통과되었다.9 제안자의 이유는 공개된 것이므로 여기 적는다. 동기 추정이 아니다. 그리고 당사자는 결정 직후 기자들에게 “참고로 쓰인다는 게 아니라, 참고한다 그게 끝이다, 영양가 없는 이야기”라고 했다. 성경이 발언하는 단계가 건너뛰어졌고, 판정 대상자가 그 사실을 먼저 말했다. 그러므로 이 결정은 “성령과 우리는”(행 15:28)이라고 말할 수 없고, 교단 구성원에게 복종을 요구할 근거도 생기지 않았다. 논쟁이 끝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직 시작되지 않은 것이다.
나는 이 결정을 교단의 분열을 피하려는 선택으로 읽는 독자를 존중한다. 그것도 목양적 고려다. 다만 분열을 피하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비워 두면, 남는 것은 분열 없는 교단이 아니라 기준 없는 교단이다.
보고서는 참고할 수 있어도 명제는 참고할 수 없다
왜 ‘참고만’이 가능했는가. 안건의 형식 때문이다. 보고서는 수십 쪽짜리 문서다. 받아들일 수도, 참고만 할 수도, 돌려보낼 수도 있다. 그러나 명제는 다르다. 명제란 참이거나 거짓인 한 문장이다. “강단에서 후보의 당락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는 것은 대교리문답 113문의 위반인가.” 이 문장에는 “참고”라는 답이 없다. “예” 아니면 “아니오”다.
그러므로 교수회 보고서는 과녁을 만들었지만 세우지는 못했다. 세우는 일은 보고서의 결론을 한 문장의 명제로 뽑아내어 가부를 묻는 것이다. 사도행전 15:19의 “내 의견에는”이 그 형식이다. 야고보는 보고서를 제출한 것이 아니라 판단을 제시했다.
없는 결의는 틀린 결의보다 바로잡기 어렵다. 틀린 결의는 바른 성경이 반박할 과녁을 준다. 31.4가 “회의는 오류를 범한다”고 미리 말해 둔 것은 그 교정을 전제한 것이다. 없는 결의는 과녁이 없다. 틀린 것이 아니라 아무것도 아니므로 바로잡을 것도 없다. 틀린 결의는 교회를 다치게 하고, 없는 결의는 교회를 무방비로 둔다. 다친 교회는 치료되지만, 무방비의 교회는 다음 상처를 막지 못한다.
총회가 하나님의 이름을 참고사항으로 분류한 날, 하나님의 이름은 선택과목이 되었다.
부결의 두 종류
명제가 상정되어 부결될 수도 있다. 그 부결에는 두 종류가 있다. “이것은 113문 위반이 아니다”를 성경으로 논증한 부결은, 틀렸을 수 있어도 결의다. 과녁이 섰으므로 31.4의 교정 대상이 된다. 다음 회의가 더 바른 성경 해석으로 뒤집을 수 있다. 반면 표결만 있었던 부결은 31.3의 조건(“말씀에 합치하면”)이 충족되지 않아 교인의 양심을 구속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도 ‘참고만’과는 다르다. “위반이 아니다”는 반박할 수 있는 문장이므로 교정은 가능하다. 없는 결의는 아니다.
둘을 가르는 것은 기록이다. 부결의 이유가 회의록에 남으면 그 결의가 “성령”의 결의인지 “우리”만의 결의인지 판별되고, 남지 않으면 판별 자체가 불가능하다. 예루살렘 회의의 편지가 결의의 내용뿐 아니라 그 근거까지 적은 이유가 여기 있다(행 15:28–29).
정리하면 이렇다. 성경 없이 표결한 결의는 “성령과 우리는”에 이르지 못한 것이고, 틀린 성경으로 표결한 결의는 “성령과 우리는”을 잘못 주장한 것이다. 앞의 것은 성령을 부르지 않았고, 뒤의 것은 성령을 헛되이 불렀다. 뒤의 것이 113문이다. 그리고 앞의 것은 113문의 첫 줄이다. 다시 말해 요구된 대로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교회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다. “예” 아니면 “아니오”. 어느 쪽이든 결론이 나면 ‘참고만’은 끝난다.
판정 둘: 그 총회
1장에서 강단을 판정했으니 총회도 판정한다. 근거는 모두 공개된 사실이다. 세 노회가 강단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쓰였는가를 물어 달라고 헌의했다. 1년의 연구가 교수회 전원의 동의로 올라왔다. 총회 신학부가 검토해 보고했다. 총회는 그 물음에 “예”도 “아니오”도 답하지 않았다. 채택 여부를 묻지 않았고, 성경을 인용하지 않았고, 판단을 내리지 않았다. 제안자는 결의가 정치적으로 해석될 것을 이유로 들었고, 당사자는 그 결정을 “영양가 없는 이야기”라 불렀으며, 결정 나흘 뒤 같은 강단은 같은 방식의 설교를 이어갔다.
113문의 첫 줄은 하나님의 이름을 요구된 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에 관한 물음이 교단의 가장 높은 회의 앞에 공식으로 놓였고, 그 회의는 답하지 않기로 표결했다. 입을 닫은 것이다. 에스겔의 말로 하면 나팔을 불지 않은 파수꾼이다. 그 뒤에 어느 강단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어떻게 쓰이든, 그 피는 묻지 않기로 한 회의의 손에서 찾아진다(겔 33:6).
그러므로 나는 이렇게 판정한다.
제76회 총회여, 당신들이 그 사람이라.
보고서가 틀렸다고 했기 때문이 아니다. 틀렸다고 말할 수 있었고, 그랬다면 다음 총회가 성경으로 고칠 수 있었다. 물음에 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두고 교단이 1년을 연구해 올린 물음을, 좌우로 읽힐까 두려워 묻지 않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 침묵을 당사자가 “영양가 없는 이야기”라 불렀고, 나흘 뒤 같은 강단이 같은 설교를 이어갔기 때문이다. 그것이 113문의 첫 줄, ‘참고만’이라 불린 침묵이다.
반대표를 던진 예순아홉 명과 보고서를 쓴 교수들과 성명을 낸 원로들은 이 판정 밖에 있다. 그들은 에스겔 33:4의 자리, 경고를 듣고 다시 나팔을 분 자리에 있다. 그리고 이 판정은 처분이 아니다. 총회를 처분할 수 있는 것은 다음 총회뿐이고, 그 길은 31.4가 열어 두었다. 회의는 오류를 범하며, 오류는 다음 회의가 바른 성경으로 고친다.
4장 시험 사례 — 선거 전주의 로마서 13장
세 기준은 가장 어려운 조건에서 증명된다. 가장 어려운 조건은 이것이다. 한 교회가 로마서를 1장부터 차례로 설교하고 있다. 이렇게 성경 한 권을 순서대로 끝까지 설교하는 방식을 연속 강해라 부른다. 그런데 본문이 로마서 13장에 이르렀고, 그 주일이 선거 전주다. 로마서 13장은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롬 13:1)로 시작하는, 국가 권력을 다루는 장이다. 몇 달 전에 정한 설교 일정이 뉴스와 정확히 겹쳤다. 이런 상황이라면 우리 강단은 무엇을 하는가.
셋 중 하나
건너뛸 수 있다. 본문이 위험하니 다음 주에 하자. 이것은 불용이다. 침묵으로 곡조를 고른 것이다. 게다가 회중에게 “이 본문은 선거와 관련이 있다”고 침묵으로 가르친 셈이다. 나팔을 불지 않은 파수꾼이니 에스겔 33:6이 적용된다.
겹침을 설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이 주간에 이 본문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오용이다. 113문이 말한 “섭리를 잘못 적용하는 것”이다. 일정은 몇 달 전에 정해졌고, 겹침은 섭리이지 메시지가 아니다. 섭리를 메시지로 읽는 순간 설교자가 곡조를 고른 것이다.
그대로 설교할 수 있다. 이것이 답이다. 그리고 그대로 설교할 때 세 기준이 저절로 작동한다. 적용이 어디서 왔는가. 로마서 13장은 통치자를 고르는 사람이 아니라 통치 아래 사는 사람에게 쓰였고, 누구를 뽑으라는 말이 없으니 본문에서 왔다. 모든 쪽에 같은 무게인가. 누가 당선되든 복종하고 기도하고 세금을 내라는 설교는 양쪽에 똑같이 해당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결과에 묶이는가. 본문이 결과를 말하지 않으므로 묶을 것이 없다.
로마서 13장이 네로 황제 치하에서 쓰였다는 사실이 설교의 핵심이다. 바울은 좋은 통치자를 전제하고 복종을 말한 것이 아니다. 이것을 말하면 설교는 어느 후보도 밀지 않으면서 모든 후보를 하나님 아래 둔다.
실천은 둘이다. 설교 첫 문장에서 이 일정이 언제 정해졌는지 밝힌다. 투명성이 오해를 막는다. 그리고 본문이 말하지 않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선언한다. 그 선언이 세 기준을 회중 앞에 공표하는 일이다.
같은 답
설교 뒤에 누군가 묻는다. “그러면 불의한 정권에도 복종하라는 말입니까.” 선거 전주에 답해야 하는가, 선거 뒤로 미뤄야 하는가.
즉시 답한다. 미루는 것은 불용이고, “투표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라”는 메시지를 침묵으로 보내는 것이다. 미룸은 또한 설교자 자신이 이 답을 선거와 묶었음을 드러낸다.
답 자체가 세 기준을 통과한다. 복종의 한계는 정권이 얼마나 좋은가에 있지 않고, 나에게 요구되는 행위가 무엇인가에 있다. 로마서 13장은 복종을 말하고, 사도행전 5:29는 그 한계를 말하며(“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다니엘 3장은 그 한계에 이르렀을 때의 형식을 보여 준다(“우리는 절하지 않겠나이다”). 이 답은 어떤 정권에도 같은 무게로 말하고, 어떤 후보도 지목하지 않으며, 어떤 결과에도 묶이지 않는다.
질문의 형식은 지킨다. 질문은 “불의한 정권”이라는 원리를 물었다. “지금 정권”이라는 사례로 바꿔 답하면 한쪽에만 쓴 것이다. 회중이 “그러면 지금 정부는 불의한가”로 좁혀 물으면, 답은 이것이다. “그 판단은 시민으로서 여러분의 것입니다. 본문은 판단의 기준을 주지 판정을 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문장을 미리 정해 둔다. “이 본문은 누구를 뽑을지 말하지 않습니다. 누가 뽑히든 어떻게 살지를 말합니다.” 이 문장이 선거 전주의 답을 선거 뒤의 답과 같게 만든다. 같으면 묶임이 없다.
선거 전과 선거 후에 같은 설교를 할 수 있는가. 하나님의 이름이 결과에 묶였는지를 가리는 검사는 이것 하나다.
유죄와 무죄의 공적 기도문
세 기준은 선고 뒤의 강단에도 적용된다. 유죄가 나올 때와 무죄가 나올 때, 예배 중의 공적 기도에서 허락되는 문장과 금지되는 문장을 나란히 둔다. 기준은 셋이다. 기도를 듣는 분이 하나님인가. 그 일을 이루실 분이 하나님인가. 결과를 미리 정해 놓지 않았는가.
| 유죄 선고 후 | 무죄 선고 후 | |
|---|---|---|
| 허락되는 문장 | “재판부에 지혜를 주소서.” (딤전 2:1–2) | “재판부에 지혜를 주소서.” |
| “제가 틀렸다면 바로잡으소서.” | “제가 틀렸다면 바로잡으소서.” | |
| “교회가 말씀을 자유롭게 전하게 하소서.” | “교회가 말씀을 자유롭게 전하게 하소서.” | |
| “이제 교회가 제 설교를 판단해 주십시오.” | “이제 교회가 제 설교를 판단해 주십시오.” | |
| 금지되는 문장 | “이 재판은 교회에 대한 박해입니다.” (기도가 아니라 선언이며, 듣는 사람이 회중) | “하나님이 신원하셨습니다.” (법원의 판단을 하나님의 판단으로 격상) |
| “순교자의 길을 저도 갑니다.” (순교자의 이름을 자기 사건에 묶음) | “박해를 이겼습니다.” (사건을 순교 이야기에 묶음) | |
| “불의한 판결을 뒤엎어 승리를 보이소서.” (자기 석방을 하나님의 승리와 동일시) | “이로써 제 설교가 옳았음이 증명됐습니다.” (법원은 선거법을 판단했지 113문을 판단하지 않음) |
표를 읽는 법은 이렇다. 가로로는 두 가지 결과가 있다. 유죄와 무죄. 세로로는 두 가지 문장이 있다. 허락되는 문장과 금지되는 문장.
먼저 윗줄, 허락되는 문장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비교해 보라. 유죄 뒤에 드릴 수 있는 기도와 무죄 뒤에 드릴 수 있는 기도가 글자 하나 다르지 않다. “재판부에 지혜를 주소서”는 유죄가 나온 날에도, 무죄가 나온 날에도 그대로 드릴 수 있다. 결과가 바뀌어도 기도는 바뀌지 않는다.
이제 아랫줄, 금지되는 문장을 비교해 보라. 왼쪽과 오른쪽이 서로 다르다. 유죄가 나오면 “박해”라는 말이 나오고, 무죄가 나오면 “신원”이라는 말이 나온다. 결과가 바뀌니 문장이 바뀐다.
이 차이가 무엇을 뜻하는가. 1장의 셋째 질문이 여기서 다시 나온다. “하나님의 이름이 결과에 묶였는가.” 묶였는지 아닌지를 알아보는 가장 쉬운 방법이 이 표다. 결과가 뒤집혀도 그대로 드릴 수 있는 기도는 하나님의 이름을 결과에 묶지 않은 기도다. 결과에 따라 달라지는 기도는 묶은 기도다. 그러니 선고가 나기 전에 두 가지 기도문을 미리 써 보라. 유죄용과 무죄용. 두 장이 같은 문장이면 하나님의 이름은 자유롭다. 두 장이 다르면 하나님의 이름을 재판 결과에 걸어 둔 것이다.
무죄가 나온 설교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은 “이제 교회가 제 설교를 판단해 주십시오”다. 그래야 법원이 교회의 판단을 대신하지 않는다. 바울은 빌립보에서 매 맞고 갇혔다가 풀려났을 때 로마 시민권을 들어 관리들의 사과를 받았지만(행 16:37–39), 그 석방을 하나님의 승리로 설교하지 않았다. 그가 설교한 것은 갇히든 풀리든 “복음이 전파되었다”는 것뿐이었다(빌 1:12–18).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두 열을 가르는 조건절이 하나 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단 3:18). 이 한 구절이 기도를 증언으로 만든다. 결과를 구하되 결과에 하나님의 이름을 묶지 않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이 조건절이 없는 결과 기도는 모두 113문의 경계에 선다.
그리고 이 조건절은 주님 자신의 기도에 있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요 12:27–28). 주기도문의 첫 간구를 주님이 직접 드리신 유일한 장면이고, 자기 죽음 앞에서 드리셨다. 하늘에서 응답이 왔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는 첫 간구 안에 이미 들어 있다.
5장 한 음성 아래서 — 목자와 양이 함께 하는 일
112문과 113문 앞에서 강단과 회중석은 같은 자리에 선다. 그래서 이 장은 목사의 장과 성도의 장을 나누지 않는다. 예수님이 양과 목자를 한 비유 안에 두셨듯(요 10:1–16), 둘을 한 장 안에 둔다. 각 절은 쌍이다. 앞부분은 우리 강단이 하는 일이고, 뒷부분은 우리 회중석이 하는 일이다. 앞만 읽는 독자도, 뒤만 읽는 독자도 반쪽을 읽은 것이다.
미리 알리기, 그리고 네 가지 검사
강단은 앞에서 말한 세 질문을 미리 회중에게 알린다. “이 강단은 본문에서 온 적용만 말하고, 모든 쪽에 같은 무게로 말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어떤 결과에도 묶지 않습니다.” 요구가 오기 전에 규칙이 있으면, 나중에 정치 설교를 거부하는 일이 인격 충돌이 아니라 규칙의 적용이 된다.
회중석은 네 가지 검사로 총회 결의문을 읽는다. 신학 공부를 하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검사다. 결의문에 성경 인용이 있는가. 없으면 31.3이 말한 “말씀에 합치하면”이라는 조건이 충족되지 않은 것이다. 인용된 본문을 앞뒤 장과 함께 읽을 때 결의문이 말하는 것을 정말 말하는가. 문맥을 확인하는 일은 전문가의 일이 아니다. 결의가 모든 진영에 같은 기준으로 적용되는가. 결의가 하나님의 이름을 특정 결과에 묶는가.
이 넷은 설교를 보는 세 기준을 결의문 읽기에 옮긴 것이다. 설교를 판별하는 도구와 결의를 판별하는 도구가 같으므로 성도는 두 번 배우지 않는다.
그리고 회중이 결의문을 읽지 못한다면, 그것은 회중의 한계가 아니라 강단의 불용이다. 바울은 교회에 직분자를 세우신 목적이 성도가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했다(엡 4:11–14). 교리문답을 가르치지 않은 강단은 분별 못 하는 회중을 만들고, 그 회중은 거짓 나팔에 무방비다. 그러므로 성도가 할 첫 행위는 자기 교회에서 112문과 113문을 배운 적이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고, 없다면 요청하는 것이다. 요청의 말은 “우리는 못 한다”가 아니라 “우리에게 가르쳐 달라”다.
연속 강해, 그리고 골라 듣지 않기
강단은 연속 강해를 택한다. 본문이 그 주의 뉴스가 아니라 성경의 순서로 정해지면, 설교자도 회중도 곡조를 고를 수 없다. 정치적으로 긴박한 주간일수록 본문을 바꾸지 않는다. 바꾸는 순간 곡조를 고른 것이다. 연속 강해는 세 기준을 지키게 하는 구조적 안전장치다.
회중석은 골라 듣지 않는다. 에스겔 33:30–32는 듣기는 좋아하되 행하지는 않는 백성을 말한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그들이 네 말을 듣고도 행하지 아니하니, 네가 그들에게는 고운 음성으로 사랑의 노래를 하는 자 같다”고 하셨다. 회중이 나팔의 곡조를 정하면 파수꾼은 악사가 된다. 바울이 말한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는” 때(딤후 4:3)는 설교자의 죄 이전에 회중의 죄다. 자기 진영을 편드는 설교만 골라 듣는 귀가, 자기 진영을 편드는 강단을 만든다.
미가야, 그리고 분별의 네 단계
강단은 선지자 미가야를 기억한다. 이스라엘 왕 아합이 전쟁에 나가려 할 때, 사백 명의 선지자가 입을 모아 “올라가소서, 이기리이다” 했다. 미가야 한 사람만 다른 말을 했다. 그는 미리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말하리라”(왕상 22:14)고 다짐했고, 그 말 때문에 옥에 갇혔다. 회중이 정치 설교를 요구하는 것은 사백 명의 선지자가 미가야에게 같은 말을 요구한 것과 같다. 1장의 판정에서 본 그 강단이 총회 직후 택한 본문이 바로 이 장이었다. 본문은 설교자를 가리지 않고 설교자를 먼저 판정한다. 설교자가 치르는 대가는 교인의 이탈이다. 그것이 내가 치르는 문장이다. 반대로 요구에 응하면 대가는 에스겔 14:10대로 설교자와 회중이 합산해 치른다.
회중석은 분별을 네 단계로 한다. 설교에서 금지된 문장을 들었다면, 먼저 사적으로 묻는다. 고발이 아니라 질문으로. “그 문장은 이런 뜻이었습니까.” 오해와 오용을 가르는 단계다. 오용으로 확인되면 직분자, 곧 당회에 가져간다. 설교는 공적인 말이므로 “두세 증인”(딤전 5:19)은 이미 충족되어 있다. 공적인 바로잡음은 회의가 한다. 개인이 회중석에서 설교자에 맞서는 또 하나의 강단을 세우지 않는다.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 14:40). 그리고 개인은 거부로 증언한다. 거부 형식은 아멘하지 않음, 지시된 대로 투표하지 않음, 서명하지 않음이다. 이것은 공적이지만 반대 강단이 아니다. 자기 몸으로 치르는 문장이기 때문이다.
왜 사적으로만 끝내지 않는가. 마태복음 18:15(“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는 형제 사이의 사적인 죄를 다룬 말씀이고, 설교는 공적인 행위다. 그래서 설교에는 다른 말씀이 적용된다.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딤전 5:20). 바울이 베드로의 잘못을 “모든 자 앞에서” 책망한 일도 그렇다(갈 2:14). 공적인 오류는 공적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잘못 들은 회중이 바로잡힘도 공적으로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다만 순서는 있다. 묻고, 가져가고, 회의가 바로잡고, 개인은 거부로 증언한다.
강요의 세 형식
여기서 “강요”가 무엇인지 알아 두어야 한다. 강요는 세 형식으로 온다. “절하라”, 곧 행위의 강요다. 신사참배의 형식이고 알아보기 쉽다. “아멘 하라, 서명하라, 투표하라”, 곧 동의의 강요다. 어떤 선언에 아멘을 요구받을 때, 아멘한 성도는 그 선언을 함께 말한 사람이 된다. 113문의 오용에 입으로 가담하는 것이다. “이의를 제기하지 말라”, 곧 침묵의 강요다. 대놓고 명령하지는 않지만, 성경을 근거로 이의를 제기하면 불이익을 받는 구조로 온다. 113문의 불용에 침묵으로 가담하는 것이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한 말, “이 때에 네가 만일 잠잠하여 말이 없으면”(에 4:14)이 이 형식을 다룬다.
알아보는 법은 한 줄이다. 나는 믿지 않는 것을 말하라고 요구받는가, 아니면 본문이 요구하는 것을 말하지 말라고 요구받는가. 앞의 것이면 둘째 형식이고 뒤의 것이면 셋째 형식이며, 둘 다 공범이 되는 문턱이다.
아직 강요가 아닌 표지도 있다. 거부해도 불이익이 없으면 강요가 아니라 분위기다. 분위기가 불편하다고 떠나는 것은 파수꾼이 성벽을 비우는 것이다. 거부에 대가가 붙기 시작하는 지점, 그때가 “우리는 못 한다”를 말할 순간이며 그 뒤의 일은 결과다. 그리고 직분에 따라 무게가 다르다. 평신도의 침묵과 장로와 목사의 침묵은 같지 않다.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약 3:1). 직분자가 셋째 형식에서 가장 먼저 책임을 진다.
두 칸, 그리고 손가락의 순서
강단은 설교 원고를 두 칸으로 나눈다. 본문이 말한 것과 내가 덧붙인 것. 본 것과 안 것. 둘째 칸이 첫째 칸보다 길어지는 주간이 있다. 그 주간이 위험한 주간이다. 적용이 본문에서 왔는지를 원고 위에서 눈으로 확인하는 방법이다.
회중석은 손가락의 순서를 지킨다. 내 눈의 들보 다음에 형제 눈의 티다(마 7:5). 자기 강단을 검사하기 전에 남의 강단을 검사하는 손가락은, 검사가 아니라 진영이다. 이 글이 내내 “우리 강단”이라고 쓰는 것이 그 순서를 지키려는 장치다.
스데반, 그리고 내보내진 성도
강단은 스데반의 기도를 배운다. 그는 돌에 맞아 죽으면서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고 기도했다. 자기를 판정한 자들을 심판하지 않고, 심판을 하나님께 맡기되, 맡기는 내용을 자비로 채웠다. 유죄를 받은 설교자가 재판관에 대해 할 수 있는 유일한 문장이 이것이다. “하나님이 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는 심판할 권한을 자기 입으로 가져온 것이고, “하나님이 그들을 용서하시길”은 그리스도의 문장이다.
회중석은 내보내질 수 있다. 아멘하지 않은 성도가 교회에서 배제될 때, 그것은 떠남이 아니라 분리당함이며, 정확히 신사참배의 구조다. 거부, 그리고 결과다. 정치적 선언에 아멘하는 것을 교제의 조건으로 삼은 교회는, 113문이 말한 “사악한 목적을 위한 신앙 고백”을 교회 차원에서 행한 것이다. 배제된 성도가 아니라 배제한 교회가 113문 앞에 선다.
내보내진 성도는 배제를 받는다. 자기 몸으로 치르는 문장의 마지막 단계다. 반대 강단을 세우지 않는다. 배제가 부당하다는 것을 자기 증언의 내용으로 삼으면, 바울이 감옥에 갇힌 일을 복음의 내용으로 삼지 않은 원리를 어기는 것이다. 기록을 남긴다. 무엇에 아멘하지 않았는지, 어떤 근거였는지. 그리고 다음 주일에 같은 신앙고백을 가진 이웃 교회에 손님으로 출석한다.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히 10:25). 교회 없이 지내는 기간은 한 주를 넘길 이유가 없다. 한 교회에서 내보내진 것이 그리스도의 몸에서 내보내진 것은 아니다. 그 교회 당회에 상황을 정직하게 알리고, 정식 이명 절차를 밟고, 성찬에서 오래 떨어져 있지 않는다. 성찬은 한 교회의 소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식탁이다.
비용의 성격을 정직하게 말해야 한다. 공동체를 잃는 것은 실제 비용이다. 그러나 그것은 순교가 아니라 불편이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마 8:20)의 수준이지 풀무불의 수준이 아니다. 비용을 과장하면 자기 사건을 순교 이야기에 묶는 것이고, 그것은 113문이 금한 것이다.
두 번째 두루마리, 그리고 세 부의 기록
강단은 두 번째 두루마리를 안다. 예레미야가 받은 말씀을 서기관 바룩이 두루마리에 적어 성전에서 읽었다. 유다 왕 여호야김은 그것을 몇 단씩 칼로 베어 화로에 던졌다(렘 36:23).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다시 쓰라고 하셨고, 두 번째 두루마리에는 첫 번째의 모든 말에 “그 같은 말을 많이 더하였”다(렘 36:28, 32). 더해진 것은 무엇이었는가. 설득이 아니라 거부의 사실과 그 결과였다. 왕이 두루마리를 불살랐다는 사실과, 그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렘 36:29–31).
그러므로 거부당한 기록을 다시 쓸 때 더하는 것은 이것이다. 언제, 어느 회의가, 어떤 형식으로 답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답하지 않은 회의가 떠안게 된 책임을 성경으로 기록한다. 더하지 않는 것은 새 논거와 동기 분석과 분노다. 이 셋은 기록을 나팔에서 고소장으로 바꾼다. 요구 수준도 낮추지 않는다. 거부당했다고 요구를 낮추면 첫 기록이 과장이었다고 스스로 인정하는 것이다.
회중석은 기록을 세 부 둔다. 답하지 않은 회의에 한 부, 답할 수 있는 다음 회의에 한 부, 작성자가 날짜와 함께 한 부. 회의에 닿을 길이 없는 사람은 공개한다. 바룩이 그랬다. 그는 왕에게 갈 수 없어 성전 뜰에서 읽었고, 들은 사람들이 왕에게 가져갔다(렘 36:10–21). 공개는 회중을 동원하는 것과 다르다. 동원은 “가져가라”고 말하는 것이고, 공개는 읽는 것이다. 세 번째 부는 서랍에 넣어 두려는 것이 아니라 첫 번째와 두 번째가 태워졌을 때 다시 쓰기 위한 것이다. 서랍 속 기록은 일기이지 나팔이 아니다. 파수꾼이 “자기 영혼을 건진다”(겔 33:9)는 말은 경고가 전달되었을 때만 성립한다. 다만 회중에게 직접 돌리지는 않는다. 회중석에서 회중에게 기록을 돌리면 그것이 반대 강단이다. 회중은 회의를 통해 듣는다.
그리고 강단과 회중석 모두 사실과 동기의 경계를 지킨다. 사실은 누구나 볼 수 있었던 것이고, 동기는 그 사람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바룩은 왕이 “칼로 베어 화로 불에 던졌다”까지 썼다. 왕이 왜 태웠는지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했다(렘 36:29). 경계는 “왜”가 등장하는 지점이다. “때문에”와 “하기 위해”가 있으면 동기다. “고의로”와 “비겁하게”가 있으면 동기다. “그들은 늘”과 “이번에도”처럼 패턴을 단정하면 동기다. 나와 반대편에 선 독자가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할 수 없는 문장만 남긴다. 그리고 “때문에”를 전부 지운다. 사실이 충분히 쌓이면 독자가 스스로 “때문에”를 채운다. 그것은 독자의 판단이지 기록자의 고소가 아니다.
본 것은 쓰고, 안 것은 쓰지 않으며, 짐작한 것은 지운다.
머무름과 떠남
여기까지를 표 하나로 제시한다. 가로는 거부에 대가가 붙었는가, 세로는 내가 나갔는가 내보내졌는가다.
| 대가가 붙기 전 | 대가가 붙은 뒤 | |
|---|---|---|
| 스스로 나감 | 파수꾼이 성벽을 비운 것. 분위기가 싫어 떠난 것. 겔 33:6이 적용된다. | 파수꾼이 성벽을 비운 것. 거부 없이 나간 것. 증언이 없다. |
| 내보내짐 | 해당 없음. 대가가 없으면 내보내짐도 없다. | 파수꾼이 성벽에서 끌려 내려온 것. 증언의 마지막 단계. 겔 33:4가 적용된다. |
스스로 나간 사람은 성벽을 비운 것이고, 내보내진 사람은 성벽에서 끌려 내려온 것이다. 에스겔 33:6은 앞의 사람에게만 적용된다.
하지 않는 것
이 장을 하지 말아야 할 일 일곱 가지로 마무리한다. 앞에서 말한 것들을 뒤집어 적은 목록이다. 왜 하지 말아야 하는지를 하나씩 붙인다.
반대 강단을 세우지 않는다. 설교에 문제가 있어도 회중석에서 설교자에 맞서 회중을 가르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 공적인 바로잡음은 회의가 하는 일이고, 개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묻고, 가져가고, 거부로 증언하는 것까지다. 설교자와 맞서는 또 하나의 강단을 세우는 순간, 그 사람도 회중을 자기 쪽으로 끌어당기는 일을 시작한 것이다.
배제된 사람들끼리 따로 모이지 않는다.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같은 이유로 내보내진 사람들이 서로 위로하는 것이 왜 잘못인가. 모임 자체가 잘못이 아니다. 그 모임이 “우리는 그 설교에 아멘하지 않은 사람들”이라는 것을 교제의 조건으로 삼을 때가 잘못이다. 정치적 선언에 아멘하는 것을 교제의 조건으로 삼은 교회를 이 글은 113문으로 비판했다. 아멘하지 않은 것을 교제의 조건으로 삼는 모임은 방향만 반대이고 구조는 같다. 그래서 내보내진 성도는 반대 모임이 아니라 이웃 교회로 간다.
요청을 말로만 하지 않는다. 앞에서 세 부의 기록을 말했다. 말로 한 요청은 기록이 없고, 기록이 없으면 거부도 남지 않는다. 거부가 남지 않으면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 아무도 모른다.
동기를 쓰지 않는다. 앞에서 사실과 동기의 경계를 말했다. “그들이 비겁해서”, “표를 의식해서”는 기록을 나팔에서 고소장으로 바꾼다.
비용을 과장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 공동체를 잃는 것은 불편이지 순교가 아니다. 과장하면 자기 사건을 순교 이야기에 묶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결과에 묶는 것과 같은 잘못이다.
결의를 무시하지 않는다. 교회 회의의 결의는 말씀에 맞는 한 복종의 대상이다(31.3). 결의가 틀렸다고 생각하면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 근거한 이의를 올리고, 결의가 아예 없으면 이 글이 한 것처럼 명제를 세워 묻는다. 무시는 회의를 없는 것으로 치는 일이고, 그것은 회의가 성경을 없는 것으로 친 것과 같은 잘못이다.
마지막으로, 설교자가 “총회 결의를 따르지 말라”고 회중을 움직이지 않는다. 그 순간 설교자는 회중에게 “너희는 하라”고 말한 것이고, 하나님의 이름을 자기 쪽 결과에 묶은 것이다. 이 장 전체가 그런 설교를 막기 위해 쓰였는데, 설교자가 그렇게 하면 이 장의 전제가 깨진다.
일곱 가지를 한 줄로 정리하면 이렇다. 결의는 강단을 다스리고, 말씀은 둘 다를 다스리며, 성도는 셋째 것만 최종으로 따른다. 풀어 쓰면, 총회의 결의는 설교자보다 위에 있고, 성경은 총회의 결의보다 위에 있으며, 성도가 끝까지 따라야 할 것은 성경 하나뿐이다. 결의가 성경과 어긋나면 성도는 성경을 따르되, 그 어긋남을 말하는 길은 반대 강단이 아니라 회의다.
6장 반대편에서 읽은 이 글
이 글은 기도문에 한 가지 검사를 했다. 글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도 아멘할 수 있는 문장만 남겼다. 본문에는 그 검사를 하지 않았다. 이 장이 그 검사다. 그 강단과 그 총회와 그 진영에서 이 글을 읽으면 무엇이라 할 것인가. 가장 강한 형태로 적고, 이 글이 어디서 답했는지 말한다. 비판이 옳은 자리에서는 옳다고 쓰고, 옳지 않은 자리에서는 그렇게 쓰지 않는다. 새 논증은 넣지 않는다. 여기서 새 논증이 필요하다면 본문이 모자란 것이고, 그러면 본문을 고쳐야 한다.
“수천 편 설교 가운데 네 편으로 한 사람을 판정하는가.” 총회장과 원로 한 분이 한 말이다. 이 글은 1장에서 답했다. 계명은 횟수를 세지 않고 사용을 묻는다. 하나님의 이름을 한 번 결과에 묶었으면 한 번 묶은 것이다. 그리고 이 글의 판정은 교수회가 본 네 편이 아니라 저자가 직접 들은 두 편과 본인의 공개 발언 위에 섰다. 이 글은 그 강단의 다른 설교를 듣지 않았다. 그래서 들은 것만 판정했고, 듣지 않은 것은 판정하지 않았다.
“정치와 종교는 분리할 수 없다. 교회가 침묵하면 신사참배 때처럼 된다.” 본인이 1심 선고 직후 한 말이다. 이 글은 1장과 2장에서 답했다. 이 글도 침묵을 죄라 부른다. 113문의 첫 줄이 그것이다. 틀린 것은 말한 것이 아니라 묶은 것이다. 신사참배 때 거부한 사람들은 총독부에 “너희는 하라”고 하지 않았고, 각자 절하지 않았다.
“너도 한쪽이다. 반대 성향 목사에게는 왜 같은 글을 쓰지 않는가.” 이 글은 서론과 2장에서 답했다. 선고 전날 기장 총회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탄핵하고”라고 기도한 것을 이 글은 적었고, 그것이 “죽어야 산다”와 같은 문장이라고 썼다. 그들에게 같은 글을 쓰지 않는 이유도 적었다. 그들은 이 사건의 당사자가 아니고, 이 글이 말을 거는 교단이 아니다. 저자는 자기 교단에 먼저 말한다.
“세속 법원이 설교를 재판한 것이 문제인데, 법원 비판은 한 줄도 없다.” 이 글은 서론에서 답했다. 법원의 판결이 옳은지는 이 글의 한계 밖이다. 이 글은 법원이 아니라 교회가 판단하라고 말하는 글이다. 교회가 자기 영역에서 판단했다면 법원의 판단은 교회에 대해 아무 권위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 판단을 비워 둔 것이 교회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는 사람을, 듣지 못한 사람이 판정하는가.” 이 글은 1장의 판정 절에서 답했다. 그 주장을 평가하지 않는다. 다만 성경이 우리에게 준 증거의 기준은 두세 증인이고(신 19:15), 음성을 들었다는 말은 증인이 아니다. 저자는 그 음성을 듣지 못했고, 들었다는 주장을 반박할 수도 없다. 그래서 반박하지 않았다.
“‘참고’는 보고서를 버린 것이 아니다. 교단의 분열을 막고 좌우로 해석될 길을 피한 지혜다.” 제안한 총대와 총회장이 한 말이다. 이 글은 3장에서 답했다. 분열을 피하려고 하나님의 이름을 비워 두면 남는 것은 분열 없는 교단이 아니라 기준 없는 교단이다. 보고서가 틀렸다면 성경으로 틀렸다고 말할 수 있었고, 그것이 결의였을 것이다. 이 결정이 목양적 고려였을 수 있다는 것을 이 글은 안다. 그 고려를 비웃지 않는다. 다만 그 고려가 성경보다 앞에 놓였다고 말한다.
“교수회가 먼저 정치적이었다. 코로나 때 비대면 예배의 문을 연 것이 그들이다.” 본인이 총회에서 한 말이다. 이 글은 교수회를 판정하지 않는다. 다만 사실은 적는다. 2020년 2월 교수회의 문서는 성명서가 아니라 총회 요청에 따른 성찰문이었고, 공예배 외의 예배를 “매우 제한적으로” 허용한다는 것이었다.9 그리고 보고서가 틀렸다면 그것을 성경으로 말하는 곳은 총회다. 그것이 이 글의 요구다. 교수회의 판단도 31.4 아래 있다. 틀릴 수 있고, 틀렸다면 총회가 고쳐야 한다. 그 점에서 이 비판은 옳다.
“작은 교회 목사가 수천 명 세례 준 목사와 총회를 판정하는가.” 이 글은 결말에서 답했다. 저자는 다윗의 자리에서 썼고, 같은 기준으로 자기가 속한 교단의 판단 아래 자기를 두었다. 계명 앞에서 강단의 크기는 무게가 아니다.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약 3:1). 저자의 강단은 작다. 당회가 없다. 이제 개척을 준비하는 중에 불과하다. 그래서 저자의 서약은 큰 강단의 서약보다 값이 싸고, 저자에게는 이 글을 가져갈 회의조차 없다. 그 값은 저자가 속한 교단이 매길 것이고, 이 글을 가져갈 사람은 읽은 사람 가운데 있을 것이다.
“선고 닷새 전에 낸 글이 재판에 영향을 주려는 것이 아니면 무엇인가.” 이 글은 서론에서 답했다. 이 글에는 재판부가 인용할 문장이 없다. 유죄가 나와도 무죄가 나와도 이 글은 같은 말을 한다. 그래서 선고 뒤에 다시 읽어 달라고 청했다.
“‘살아야 산다’로 이미 고쳤는데 무엇을 더 요구하는가.” 이 글은 1장의 판정 절에서 답했다. 고친 것을 먼저 적었고, 옳았다고 썼다. 그러나 같은 설교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다시 결과에 묶였다. 요구하는 것은 하나다. 묶지 말라.
열 가지를 적었다. 하나도 가볍지 않다. 그리고 하나도 이 글의 주장을 바꾸지 못했다. 바꿀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비판이 아니라 결론이다. 총회의 결론이다. 글은 읽히고, 결론을 기다린다.
결말 — 명제, 서약, 기도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내 설교 원고를 몇 편 다시 읽었다. 두 칸으로 나누어 보았다. 본 것과 안 것. 둘째 칸이 길었던 주간이 있었다.
그래서 이 글은 나를 먼저 지나서 나간다.
주장을 다시 세운다. 이 사건의 핵심은 선거법이 아니라 제3계명이며, 교회는 그 판단을 법원에 맡겨 두었다. 법원은 자기 일을 했다. 교회는 아직 하지 않았다. 그 일은 이것이다. 강단에서 후보의 당락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는 것은 대교리문답 113문의 위반인가. “예” 아니면 “아니오”.
이 글의 답은 두 번 다 “예”다. 1장에서 그 강단을, 3장에서 그 총회를 판정했다. 그러나 이 글의 답은 교회의 답이 아니다. 교회의 답은 아직 공란이다.
이 글은 그 공란을 대신 채우지 않는다. 글이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글은 나팔이다. 나팔은 깨우지, 판단하지 않는다. 판단은 성경에 근거한 회의가 하고, 그 회의가 “성령과 우리는”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끝난다. 그러므로 이 명제에 답하는 것은 이 글의 일이 아니다. 성령과 교회의 일이다.
글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다. 다시 읽힐 수 있게 고정되어 있는 것. 그래서 이 글은 판결 뒤에도, 총회의 결론 뒤에도 고치지 않는다. 가결되면 이 글은 그 결론에 이르는 과정의 기록이 되고, 부결되면 31.4의 교정을 기다리는 이의의 기록이 된다. 어느 쪽이든 기록이다. 두 번째 두루마리는 첫 두루마리가 태워진 뒤에도 첫 두루마리의 모든 말을 담았다(렘 36:28).
서약
나는 세 질문 아래서 설교할 것이다. 본문에서 온 적용만 말하고, 모든 쪽에 같은 무게로 말하며, 하나님의 이름을 어떤 결과에도 묶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것을 어기면, 내가 속한 교단이 이 글로 나를 판단해 주기를 청한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그 서약의 증인이다.
한 가지를 정직하게 적어야 한다. 나는 헌의할 자격이 없고, 발언할 자리가 없다. 그래서 이 글은 공개된다. 바룩도 왕에게 갈 길이 없었다. 그는 성전 뜰에서 백성 앞에 두루마리를 읽었고(렘 36:10), 그것을 들은 사람들이 왕에게 가져갔다(렘 36:11–21). 나는 읽는다. 가져갈 사람은 읽은 사람 가운데 있을 것이다. 그 뒤는 들은 자의 몫이다(겔 33:4).
왜 서약이 필요한가. 서약은 글쓴이를 나단의 자리에서 다윗의 자리로 옮기는 장치다. 세 기준이 내 강단에 먼저 적용되지 않으면 이 글은 한쪽만 보는 글이 되고, 자기가 세운 기준을 스스로 어기는 것이다. 그래서 서약은 글의 장식이 아니라 글의 조건이다.
기도
이 기도는 한 가지 검사를 거쳤다. 이 글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 독자도, 그 설교자를 지지하는 독자도, 아멘할 수 없는 문장이 한 줄이라도 있는가. 있다면 지웠다. 그래서 이 기도는 누구의 회개도, 어떤 판결도, 어떤 결론도 미리 정해 놓지 않는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부산의 그 강단과 그 교회가 말씀 앞에 서게 하소서.
재판부에 지혜를 주시고, 총회에 결론을 주소서.
교회의 자유가 말씀의 자유로 지켜지게 하소서.
성령이여, 교회가 이 명제에 말씀으로 답하게 하소서.
우리 강단을 같은 계명 아래 두시고, 저와 제 강단을 먼저 두소서.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주는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이 글은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출 20:7)로 열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로 닫힌다. 같은 이름, 다른 법(法). 계명은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요구하고, 기도는 하나님이 하시도록 구한다. 그 사이에 계명을 완전히 지키신 분이 서 계시고, 그분이 그 계명을 기도로 가르치셨다(마 6:9). 강단은 세 기준을 노력으로 지키지 못한다. 113문이 금한 것을 피하는 길은 112문이 요구한 것을 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글의 마지막은 선언이 아니라 기도다.
아멘은 무해하지 않다. 5장에서 말했듯 아멘은 남의 말을 내 말로 삼는 일이다. 이 기도에 아멘한 사람은 “재판부에 지혜를”, “총회에 결론을”, “저와 제 강단을 먼저”를 자기 입으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멘한 뒤에 할 일이 있다. 재판 결과를 하나님의 승리라고도 박해라고도 부르지 않는 것. 총회가 결론을 내리도록 묻는 것. 남의 강단보다 자기 강단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 이 글의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도 이 기도에는 아멘할 수 있게 썼다고 했다. 그러니 아멘한 사람은, 찬성하든 반대하든, 이 세 가지 안에 들어온 것이다.
아멘한 사람이, 그 기도대로.
부록
1. 사실 연표
| 날짜 | 사실 | 출처 |
|---|---|---|
| 2025-01-05 | 세계로교회 주일 2부 예배 설교 “이재명이 죽어야 대한민국이 산다!” | 13 |
| 2025-01-11 | 세이브코리아 집회 시작(서울 국회의사당 인근), 이후 매주 토요일 전국 집회 | 14 |
| 2025-03-16 | 세계로교회 주일 2부 예배에서 부산시교육감 보궐선거 후보와의 대담 진행 | 3 |
| 2025-04-03 | 헌법재판소 선고 전날, 기장 총회 주최 시국 기도회 “탄핵 인용 촉구”; 같은 시기 세이브코리아 집회 “탄핵 기각 촉구” | 15 14 |
| 2025-05 | 제21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예배 중 특정 후보 당선·낙선 관련 설교 및 기도문 낭독(검찰 공소사실) | 1 |
| 2025-09 | 공직선거법 등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 | 1 |
| 2025-09 | 예장 고신 제75회 총회, 서울중부·전라·충청서부 노회의 청원에 따라 총회 신학부와 고려신학대학원 교수회에 설교 네 편의 신학적 연구 위탁 | 6 |
| 2026-01-30 | 부산지방법원 형사6부, 징역 6개월·집행유예 1년 선고. 피고인·검찰 쌍방 항소 | 1 |
| 2026-04-15 | 부산고등법원 형사2부, 항소심 첫 공판 | 8 |
| 2026-08-26 | 항소심 결심공판. 선고기일 10월 28일 오후 2시로 지정 | 3 |
| 2026-09-06 | 세계로교회 주일 2부 예배 설교 “적진을 향하여 달릴 때”(시 18:1–6, 29) | 12 |
| 2026-09-16 | 예장 고신 제76회 총회, 보고서 채택 가부는 묻지 않고 “참고만” 수정안을 350표 중 281표로 가결 | 2 9 |
| 2026-09-20 | 세계로교회 주일 2부 예배 설교 “아합왕의 최후와 이재명이 사는 길은?”(왕상 22:34–38) | 11 |
| 2026-10-07 | 고려신학대학원 은퇴 교수·교단 원로 12인, ‘참고만’ 결정 비판 성명 | 10 |
| 2026-10-28 | 부산고등법원 형사2부는 ______________ 를 선고했다. | (선고 후 기입) |
| ______ | 대법원은 ______________ . | (확정 후 기입) |
연표 기입 규칙은 서론의 세 줄과 같다. 주어는 법원, 평가하는 말 없음, 날짜와 선고 내용만.
2. 명제 아래의 공란
강단에서 후보의 당락을 하나님의 뜻과 동일시하는 것은 대교리문답 113문의 위반인가.
교회의 답: ______________ (회의 · 날짜 · 근거 본문: ______________)
본문은 판결에 닫혀 있고 연표는 판결에 열려 있으며, 둘이 한 글 안에 있어야 닫힘이 증명된다.
3. 수정 이력
| 날짜 | 고친 곳 | 내용 | 이유 |
|---|---|---|---|
| 2026-10-23 | — | 게시 | — |
고치는 것: 사실 오류, 오탈자, 인용 번호, 표현. 고치지 않는 것: 주장, 근거, 적용.
4. 웨스트민스터 문서 판본에 관한 주
대교리문답 112·113문의 본문은 1648년 영문 원문에서 저자가 직역했다. 고신 총회가 발행한 공식 한글 번역본과 어구가 다를 수 있으며, 공식 번역본이 확인되면 그것으로 교체하고 수정 이력에 기록한다. 신앙고백서 31장은 1647년 원본의 항 번호를 기준으로 쓰고 1788년 미국 개정본 번호를 괄호에 병기했다. 미국 개정본은 원본 31.2(국가 위정자의 회의 소집권)를 삭제하여 이후 항이 하나씩 앞당겨졌다. 2026년 10월 7일 교단 원로 성명은 회의의 오류 가능성을 다룬 조항을 “31장 4항”으로 인용했다.10 원본 번호 체계다. 그러므로 고신 안에서 통용되는 번호는 원본 체계로 보이며, 이 글은 원본 번호를 본문에, 미국본 번호를 괄호에 둔다. 헌법 조문으로 확인되면 단일 번호로 통일한다.
5. 용어 풀이
당회·노회·총회. 장로교회의 세 단계 회의. 당회는 한 교회의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다. 노회는 한 지역 여러 교회의 목사와 장로 대표로 구성된다. 총회는 각 노회가 보낸 대표(총대)로 구성되는 교단 최고 회의로, 보통 1년에 한 번 모인다.
헌의·청원. 노회나 교회가 총회에 어떤 사안을 다루어 달라고 정식으로 올리는 것. 이번 사건에서는 세 노회가 그 설교에 대한 교단의 신학적 입장을 정리해 달라고 헌의했다.
결의. 회의가 표결로 내린 결정. 교단 안에서 구속력을 가진다.
치리. 교회가 교인이나 직분자의 잘못을 교회법에 따라 다루는 일. 권면, 견책, 정직, 면직, 출교 등의 단계가 있다. 이 글은 치리를 다루지 않는다.
총회 신학부. 총회 안에 두는 상임 부서로, 교단의 신학적 사안을 검토한다.
고려신학대학원. 고신 교단의 목회자 양성 신학교. 그 교수들의 회의체가 교수회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 1646년 영국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작성한 장로교 신앙고백. 33개 장으로 되어 있고, 31장이 교회 회의를 다룬다.
웨스트민스터 대교리문답. 같은 총회가 1647년에 작성한 196개 문답. 소교리문답(107문)보다 길고 자세하다. 98문부터 148문까지가 십계명 해설이고, 112·113문이 제3계명을 다룬다.
제3계명. 십계명의 세 번째.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출 20:7, 신 5:11).
주기도문의 첫 간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예수님이 가르치신 기도의 여섯 간구 중 첫째.
연속 강해. 성경 한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설교하는 방식. 설교자가 그때그때 본문을 고르는 주제 설교와 구별된다.
파수꾼. 성벽 위에서 적의 접근을 살피다가 나팔로 알리는 사람. 에스겔 33장에서 하나님은 선지자를 파수꾼에 빗대신다.
증언과 동원. 이 글에서 쓰는 구별. 증언은 “우리는 못 한다”는 문장으로, 말한 사람이 그 대가를 치른다. 동원은 “너희는 하라”는 문장으로, 남에게 결과를 요구한다.
기원·범위·결속. 이 글에서 설교를 검사하는 세 질문. 적용이 본문에서 왔는가(기원), 모든 쪽에 같은 무게로 떨어지는가(범위), 하나님의 이름이 특정 결과에 묶이는가(결속).
아멘 검사. 이 글의 결말 기도문에 적용한 검사. 글의 주장에 반대하는 독자도 아멘할 수 있는 문장만 남기는 것. 6장은 같은 검사를 본문에 적용한 것이다.
6. 미주
아래 번호는 본문의 미주 번호다.
- 「손현보 목사, 집행유예로 석방…“미국에 감사”」, YTN, 2026년 1월 30일, https://v.daum.net/v/20260130151316214; 「‘선거법 위반 혐의’ 손현보 목사, 징역 6개월·집유 1년」, 조선일보(네이트뉴스 전재), 2026년 1월 31일, https://news.nate.com/view/20260131n00332. 구속 시점은 후자의 “작년 9월 구속된 지 약 5개월 만” 보도에 따름.
- 「고신, 손현보 목사 보고서는 ‘참고만’… 재투표 끝에 신진수 총회장 선출」, CBS노컷뉴스, 2026년 9월, https://www.nocutnews.co.kr/news/6580159; 「예장 고신⑦ 손현보 목사 설교 보고서 채택 안 해…“총회와 신대원 권위 무너뜨려”」, CBS노컷뉴스, 2026년 9월, https://www.nocutnews.co.kr/news/6579329.
- 「예배시간 정승윤 부산교육감 후보 지지유도 손현보, 항소심 선고기일 잡혀」, 교회와신앙, 2026년 8월 27일, https://www.amen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32582.
- Westminster Larger Catechism (1648), Q. 112–113. 저자 직역. 영문 원문은 The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and Catechisms (Lawrenceville, GA: Committee for Christian Education and Publications, PCA, 2007) 등 통용 판본 참조.
-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1647), ch. 31; cf. the 1788 American revision adopted by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조항 번호 대응: 원본 31.3·31.4·31.5 = 미국본 31.2·31.3·31.4.
- 「‘손현보 목사 설교 보고서’ 놓고…고신 내부 찬반 격론」, CBS노컷뉴스, 2026년 9월, https://nocutnews.co.kr/news/6572440; 「고신 원로·은퇴 교수들 “고신 정체성과 전통 스스로 무너뜨려”」, CBS노컷뉴스, 2026년 9월, https://www.nocutnews.co.kr/news/6588566.
- 「손현보 목사 설교 1년 연구한 결과…“고신 신앙고백과 충돌”」, CBS노컷뉴스, 2026년 8월, https://nocutnews.co.kr/news/6566319.
- 「손현보 항소심 시작 “잡아넣으면 쉬다가 나오면 돼”」, 평화나무(로고시안 전재), 2026년 4월 15일, https://www.logosian.com/news/articleView.html?idxno=11693.
- 안디도, 「[고신4] 예장고신, 손현보 목사 설교 보고서 채택도 부결도 안 했다」, 뉴스앤조이, 2026년 9월 16일,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400740.
- 장세인, 「고신 원로·은퇴 교수들 “고신 정체성과 전통 스스로 무너뜨려”」(성명서 전문 수록), CBS노컷뉴스, 2026년 10월 7일, https://christian.nocutnews.co.kr/news/6588565.
- 손현보, 「아합왕의 최후와 이재명이 사는 길은?」(열왕기상 22:34–38), 세계로교회 주일 2부 예배 설교, 2026년 9월 20일, YouTube, https://youtu.be/bF3vY3RZAPQ. 본문 인용은 저자가 확보한 녹취에 따르며, 인용 위치는 02:57, 03:49, 04:32, 21:37, 44:06, 45:37–46:36, 48:29.
- 손현보, 「적진을 향하여 달릴 때」(시편 18:1–6, 29), 세계로교회 주일 2부 예배 설교, 2026년 9월 6일, YouTube, https://youtu.be/wDP9WgwNq5I. 인용 위치는 29:40, 39:09, 39:57, 47:25, 49:17.
- 손현보, 「이재명이 죽어야 대한민국이 산다!」, 세계로교회 주일 2부 예배 설교, 2025년 1월 5일, YouTube, https://youtu.be/CkGZuVlwmzQ. 이 글은 제목만 인용한다.
- 「[종교와 정치] 극우의 아이콘 된 손현보···믿는다, ‘여의도 우파’ 부활」, 주간경향, 2025년 5월 5일, https://weekly.khan.co.kr/article/202505050600001.
- 엄태빈, 「탄핵 선고 D-1, 기장·예장통합·기독교시국행동, 윤석열 파면 촉구 기도회」, 뉴스앤조이, 2025년 4월 3일,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7256. 이 글은 발언자의 개인 이름을 적지 않는다. 그들은 이 글이 판정하는 대상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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