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인제사장, 쉽게 다시 읽기

종교개혁 509주년 · 2026년 10월 26일 · 지중배 (Ph.D.)

들어가며: 두 가지 말

종교개혁 509주년을 맞습니다. 저는 해마다 이맘때면 같은 단어 앞에 섭니다. 만인제사장(萬人祭司長)입니다.

목회 현장에서 이 단어는 두 가지 얼굴로 나타납니다. 한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만인제사장이니까 목사 없어도 됩니다. 저 혼자 하나님 믿으면 됩니다.” 다른 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목사님은 기름 부음 받은 주의 종입니다.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두 말은 정반대처럼 들립니다. 그런데 둘 다 같은 교리를 오해한 결과입니다. 하나는 교회를 버렸고, 다른 하나는 종교개혁 이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렇다면 만인제사장은 정말 무슨 뜻일까요? 루터는 무엇을 말했을까요? 그리고 오늘 우리는 이 교리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만인제사장, 한 문장으로

먼저 결론부터 말씀드립니다. 만인제사장은 그리스도와 하나 된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 서고 이웃을 위해 서는 제사장 공동체가 되었다는 가르침입니다.

구약의 제사장은 세 가지 일을 했습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백성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백성에게 하나님의 복을 빌었습니다. 제사장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서는 사람이었습니다.

신약은 이 자리에 단 한 분을 세웁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히브리서는 그분을 “큰 대제사장”이라 부릅니다(히 4:14). 바울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고 말합니다(딤전 2:5).

그리고 베드로는 이렇게 선언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벧전 2:9). 여기서 눈여겨볼 말이 있습니다. ‘족속’, ‘나라’, ‘제사장들’입니다. 모두 공동체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성경은 “너 한 사람이 제사장이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너희가 함께 제사장 나라다”라고 말합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전에는 은행 일을 보려면 창구 직원을 거쳐야 했습니다. 지금은 스마트폰 앱으로 직접 합니다. 많은 사람이 만인제사장을 이렇게 이해합니다. “이제 중간에 사람이 필요 없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립니다. 우리 사이에 서 있던 인간 사제는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중보자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그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서 계십니다. 그리고 우리는 앱 사용자가 된 것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 기도하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만인제사장은 ‘나를 위한 직통 회선’이 아닙니다. ‘이웃을 위한 중보의 자리’입니다.

루터는 무엇을 말했나

먼저 바로잡을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는 ‘만인제사장’이라는 단어를 쓴 적이 없습니다. 이 용어는 후대에 굳어진 이름입니다. 루터가 말한 내용은 분명히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름은 나중에 붙었습니다.

1520년, 루터는 『독일 기독교 귀족에게』라는 글을 씁니다. 당시 로마 교회는 사람을 두 신분으로 나누었습니다. 성직자는 ‘영적 신분’이었고, 나머지는 ‘세속 신분’이었습니다. 성직자는 더 높은 사람이었습니다. 왕도 함부로 손댈 수 없었습니다.

루터는 이 벽을 허뭅니다. 그는 세례받은 모든 사람이 이미 사제로 성별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구분합니다. 그리스도인 사이의 차이는 신분에 있지 않고 직무에 있다.

루터는 쉬운 예를 듭니다. 구두 수선공, 대장장이, 농부. 이들은 각자 자기 일과 직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두 똑같이 성별된 사제입니다. 목사와 구두 수선공의 차이는 거룩함의 높낮이가 아닙니다. 맡은 일의 차이입니다.

여기서 많은 사람이 멈춥니다. “그렇다면 누구나 설교하고 성례를 베풀어도 되겠네.” 루터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신자가 제사장이지만,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말씀을 전하고 성례를 베푸는 일은 공동체가 질서 있게 부른 사람에게 맡겨집니다.

이 원칙은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 신앙고백』 제14조에 문서로 남았습니다. 합당한 부르심을 받지 않은 사람은 교회에서 공적으로 가르치거나 성례를 집행할 수 없다는 내용입니다. 루터에게 만인제사장과 목회 직분은 처음부터 한 쌍이었습니다.

루터는 목사를 없애지 않았습니다. 목사 위에 씌워진 왕관을 벗겼을 뿐입니다.

개혁교회는 어떻게 받았나

우리 교회는 개혁주의 전통에 서 있습니다. 그래서 루터만큼 중요한 질문이 있습니다. 스위스와 독일의 개혁교회는 이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요?

울리히 츠빙글리(Huldrych Zwingli)는 1523년 「67개 조항」 제17조에서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만이 유일하고 영원한 대제사장이시다. 스스로 대제사장을 자처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대적하는 것이다. 출발점이 ‘나의 권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유일하심’이었습니다.

장 칼뱅(John Calvin)은 그리스도의 세 직분을 정리했습니다. 선지자, 제사장, 왕입니다. 그리고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한 성도가 이 직분의 유익에 참여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다만 성도가 드리는 제사는 죄를 씻는 제사가 아닙니다. 그 제사는 십자가에서 단번에 끝났습니다. 성도의 제사는 찬양과 감사의 제사입니다. 칼뱅은 또 모든 정당한 직업이 하나님 앞에서 귀하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는 1566년 『제2 스위스 신앙고백』 제18장에서 이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정리합니다. “제사장직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공통된 것이다. 그러나 사역은 그렇지 않다.” 모든 성도가 제사장입니다. 그러나 모든 성도가 목사인 것은 아닙니다.

가장 아름다운 정리는 1563년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32문에 있습니다.

문: 그런데 당신은 왜 그리스도인이라 불립니까?

답: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어 그분의 기름 부음에 참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선지자로서 그분의 이름을 고백하고, 제사장으로서 나 자신을 감사의 산 제물로 그분께 드리며, 왕으로서 이 세상에서 자유롭고 선한 양심으로 죄와 마귀에 맞서 싸우고, 장차 영원히 그분과 함께 모든 피조물을 다스립니다.

이 문답에는 ‘만인제사장’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가장 분명합니다. 순서를 보십시오. 먼저 그리스도가 기름 부음 받으셨습니다(제31문). 그다음 우리가 그분과 하나 되어 그 기름 부음에 참여합니다(제32문). 우리가 제사장인 이유는 우리가 대단해서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붙어 있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웨스트민스터 대·소요리문답』은 그리스도의 세 직분을 자세히 설명하지만, 성도가 그 직분에 참여한다는 문답은 따로 두지 않습니다. 이것을 부정으로 읽을 필요는 없습니다. 웨스트민스터는 그리스도의 중보가 유일하고 충분하다는 데 집중했을 뿐입니다.

우리가 제사장이 된 것은 권리를 얻어서가 아닙니다. 기름 부음 받으신 분께 붙어 있어서입니다.

숫자로 본 한국교회의 자리

교리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숫자를 보겠습니다. 숫자는 차갑습니다. 그러나 정직합니다.

지표 수치 출처
개신교인 비율 (2025) 20% (종교 없음 51%) 한국리서치, 2025.12
종교 호감도 (2025, 100점 만점) 불교 54.4 · 천주교 52.7 · 개신교 34.7 한국리서치, 2025.12
가나안 성도 비율 (개신교인 중) 2012년 10.5% → 2017년 23.3% → 2022년 29.3% 한목협·목회데이터연구소 (노컷뉴스, 2023.3.3)
이단 교회 출석 응답 (개신교인 중) 6.3% (최소 34만~최대 66만 명 추정) 목회데이터연구소 (노컷뉴스, 2023.3.3)

조사마다 개신교인 비율은 조금씩 다릅니다. 2022년 한국갤럽 면접조사를 분석한 목회데이터연구소는 15%로 보았습니다. 정부 통계는 아직입니다. 국가데이터처는 2025년 인구주택총조사 표본 결과를 2026년 11월 말 공표할 계획입니다.

이 숫자들이 만인제사장과 무슨 상관일까요? 저는 두 가지를 봅니다.

첫 번째는 가나안 성도입니다. 신앙은 있지만 교회에 나가지 않는 분들입니다. 열 명 중 세 명입니다. 그분들 가운데 많은 분이 교회에서 상처를 받았습니다. 그 상처를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다만 “나 혼자 하나님 앞에 서면 된다”는 생각이 만인제사장의 정답은 아니라는 점은 분명히 말씀드려야 합니다.

두 번째는 이단입니다. 공동체의 분별 없이 “내가 성경을 직접 받았다”고 말하는 곳에서 이단은 자랍니다. 만인제사장을 ‘개인이 마음대로 해석할 권리’로 오해하면, 교회는 오히려 이단에 약해집니다.

교회를 떠난 제사장은 자유로운 제사장이 아닙니다. 혼자 남겨진 제사장입니다.

한국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다섯 가지

이제 조금 아픈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저도 목사입니다. 그래서 이 비판은 저를 먼저 향합니다.

오해 1. “만인제사장이니 목사도, 교회도 필요 없다”

가장 흔한 오해입니다. “우리 모두 제사장인데 왜 목사 말을 들어야 하나요?” “유튜브 설교 듣고 집에서 예배하면 되지 않나요?”

앞에서 보았듯이 루터도, 칼뱅도, 불링거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사장직은 모두의 것이지만, 말씀 사역은 부름받은 사람의 것입니다. 축구팀을 생각해 보십시오. 열한 명 모두가 선수입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골키퍼 장갑을 끼지는 않습니다. 모두가 선수라는 사실이 포지션을 없애지 않습니다.

바른 이해: 만인제사장은 직분을 없애는 교리가 아닙니다. 직분을 제자리에 돌려놓는 교리입니다. 목사는 성도 위에 있는 사람이 아니라, 성도가 제사장으로 살도록 말씀으로 준비시키는 사람입니다(엡 4:11–12).

오해 2. “목사님은 기름 부음 받은 주의 종이다”

첫 번째 오해의 정반대입니다. 그리고 한국교회에 더 깊이 뿌리내린 오해입니다. 목사를 구약 제사장처럼 대합니다. 목사의 기도는 더 잘 통하고, 목사를 비판하면 벌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이때 자주 인용되는 말씀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삼상 26:9)입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다윗이 사울 왕을 죽이지 않겠다고 한 말입니다. 목사를 비판에서 지켜 주는 보호막이 아닙니다. 더구나 신약에서 기름 부음은 목사만 받은 것이 아닙니다. 하이델베르크 제32문이 말하듯, 그리스도와 연합한 모든 성도가 그 기름 부음에 참여합니다(요일 2:20, 27).

루터는 성직자를 ‘사제(sacerdos)’라고 부르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신약의 직분자는 ‘봉사자(minister)’라고 했습니다. 목사(牧師)를 영어로 minister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바른 이해: 목사는 제사장이 아닙니다. 말씀의 종입니다. 목사의 권위는 직함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가 전하는 말씀이 성경에 맞을 때 생깁니다. 성도는 목사를 존중하되, 그 설교를 성경으로 분별해야 합니다(행 17:11).

오해 3. 직분이 계급이 되었다

한국교회에는 직분이 많습니다. 권찰, 서리집사, 안수집사, 권사, 장로. 그런데 이 직분이 섬김의 이름이 아니라 계급의 이름처럼 쓰일 때가 많습니다. “장로님은 언제 되셨어요?”라는 질문이 “어디까지 올라가셨어요?”처럼 들립니다.

더 아픈 현실도 있습니다. 2011년 기독교윤리실천운동 등이 연 ‘목회자와 돈’ 심포지엄에서는 교계에 떠도는 말이 공개적으로 거론되었습니다. “권사 수백만 원, 장로 수천만 원.” 직분을 받을 때 내는 이른바 직분 헌금입니다. 당시 발표자는 직분 헌금을 없애고 불필요한 직분을 점차 정리하자고 제안했습니다. 15년이 지난 지금도 이 관행이 사라졌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루터가 허문 첫 번째 벽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신분의 벽입니다. 루터는 말했습니다. 차이는 신분이 아니라 직무다. 그런데 우리는 그 벽을 교회 안에 다시 세웠습니다. 이번에는 돈으로 세웠습니다.

바른 이해: 직분은 신분 상승이 아니라 섬김의 위임입니다. 직분 헌금은 폐지되어야 합니다. 직분자 선출은 헌금 액수나 교회 다닌 햇수가 아니라, 디모데전서 3장과 디도서 1장의 성품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오해 4. “주일은 거룩하고, 월요일은 세상일이다”

많은 성도가 이렇게 생각합니다. 교회에서 찬양하고 봉사하는 시간은 거룩합니다. 회사에서 엑셀을 만지고, 편의점에서 계산하고, 병원에서 주사를 놓는 시간은 그냥 생계입니다.

루터는 구두 수선공도 사제라고 했습니다. 칼뱅은 모든 정당한 직업이 하나님 앞에서 귀하다고 했습니다. 하이델베르크는 제사장이 ‘나 자신을’ 감사의 제물로 드린다고 말합니다. 주일 한 시간만이 아니라, 나의 일주일 전체가 제물입니다.

바른 이해: 교회 봉사를 많이 하는 사람이 더 좋은 제사장이 아닙니다. 월요일 아침 정직하게 일하는 성도도 제사장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성도를 교회 안 프로그램으로만 붙잡지 말고, 세상 속 일터로 보내야 합니다.

오해 5. “제사장이니까 나는 하나님과 직통이다”

마지막 오해는 개인주의입니다. 만인제사장을 ‘나의 영적 특권’으로만 이해합니다. 나는 하나님과 직접 통하니 아무에게도 묻지 않겠다. 성경도 내 마음대로 읽겠다.

그러나 제사장은 원래 자기를 위한 직분이 아닙니다. 남을 위해 서는 직분입니다. 루터는 『그리스도인의 자유』에서 신자가 제사장으로서 이웃을 위해 하나님 앞에 선다고 했습니다. 앞에서 본 이단 통계가 보여 주듯, 공동체를 떠난 ‘직통 신앙’은 쉽게 길을 잃습니다.

바른 이해: 나는 제사장입니다. 그래서 내 옆 사람을 위해 기도합니다. 그리고 나도 그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제사장들은 서로를 위한 제사장입니다.

오해 1과 오해 2는 정반대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둘 다 그리스도를 빼고 사람을 중심에 세운 결과입니다.

우리 역사 속의 제사장들

만인제사장은 먼 유럽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한국 개신교의 시작이 바로 이 모습이었습니다.

1880년대 초, 만주에서 스코틀랜드 선교사 존 로스(John Ross)가 한글 성경 번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곁에서 번역을 도운 한국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중 한 사람이 서상륜입니다. 그는 목사가 아니었습니다. 장사를 하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서상륜은 번역된 복음서를 몰래 들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그리고 황해도 소래(솔내) 마을에서 동생 서경조와 함께 이웃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1880년대 중반, 그곳에 한국인 스스로 세운 신앙 공동체가 생겼습니다. 우리가 흔히 소래교회라고 부르는 곳입니다. 서양 선교사가 와서 세례를 베풀기 전에 이미 말씀을 읽고 모이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두 가지를 함께 보아야 합니다. 첫째, 평신도가 복음을 들고 이웃 앞에 섰습니다. 이것이 제사장의 모습입니다. 둘째, 그들은 혼자 신앙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모였고, 함께 말씀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선교사들이 오자 세례를 받고 교회의 질서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평신도의 열심과 직분의 질서가 서로 다투지 않았습니다.

한국교회는 목사의 강단이 아니라 평신도의 봇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제사장으로 사는 법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게 제사장으로 살 수 있을까요? 하이델베르크 제32문의 세 직분을 따라 생각해 보겠습니다.

성도에게: 선지자, 제사장, 왕으로

선지자로서 고백합니다. 회사 점심 자리에서 “저는 교회 다녀요”라고 말하는 것이 시작입니다. 큰 설교가 아니어도 됩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숨기지 않는 것입니다.

제사장으로서 나를 드립니다. 간호사가 밤샘 근무 중에 환자를 위해 속으로 짧게 기도합니다. 편의점 직원이 진상 손님 앞에서 한 번 더 참습니다. 개발자가 아무도 보지 않는 코드를 정직하게 짭니다. 이것이 감사의 산 제물입니다. 그리고 내 기도 수첩에 동료와 이웃의 이름을 적습니다. 제사장은 남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입니다.

왕으로서 싸웁니다. 왕의 직분은 남을 다스리는 권세가 아닙니다. 먼저 내 안의 죄와 싸우는 일입니다. 영수증을 부풀리지 않고, 뒷담화에 끼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게: 네 가지 제안

  1. 직분 헌금을 없앱니다. 직분은 사고파는 것이 아닙니다.
  2. 직분자를 성경의 성품 기준으로 세웁니다. 임기를 두고, 섬김이 끝나면 다시 평성도로 돌아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문화를 만듭니다.
  3. 성도에게 교리를 가르칩니다. 요리문답 공부는 성도를 스스로 성경을 분별하는 제사장으로 세웁니다. 이것이 이단을 막는 가장 좋은 길입니다.
  4. 목사는 성도를 교회 안에 붙잡아 두지 않고 세상으로 파송합니다. 월요일의 일터가 성도의 제단입니다.

제사장의 제단은 예배당 안에 있지 않습니다. 월요일 아침 내 책상 위에 있습니다.

맺으며

저는 목사입니다. 그래서 이 글을 쓰며 자주 멈췄습니다. 오해 2를 쓸 때는 특히 그랬습니다. 성도들이 저를 ‘주의 종’이라 부를 때, 저는 그 말을 고쳐 준 적이 있었는지 돌아보았습니다. ……

종교개혁은 509년 전에 끝난 사건이 아닙니다. 교회는 늘 다시 개혁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개혁은 언제나 같은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다시 중심에 세우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만이 대제사장이십니다. 목사도 성도도 그분 앞에서는 모두 같은 자리에 섭니다. 그리고 그분께 붙어 있는 모든 사람은 제사장입니다. 주일 예배당에서도, 월요일 일터에서도, 화요일 병상 곁에서도.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각자의 자리로 갑니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 높아지려는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당신은 제사장입니다. 그리스도께 붙어 있는 한,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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