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내 것’이 늘어날수록 마음이 더 불안해지지 않습니까? 집도, 통장도, 건강도, 쥘수록 잃을까 두렵습니다. 그런데 교리문답의 첫 대답은 거꾸로 갑니다. 위로는, 내가 내 것이 아니라는 자리에서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설교자입니다. 그런데 위로가 필요한 날이 많습니다. 말씀을 전하고 내려온 저녁, 마음이 텅 빌 때가 있습니다. 내일이 계산되지 않는 밤이면 저는 제 이름으로 된 것들을 세어 봅니다. 그런데 이상합니다. 세어 볼수록 더 허전합니다. 여러분도 그런 밤이 있지 않습니까?
성경에 ‘위로’라는 한 단어를 평생 기다리며 산 사람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시므온입니다. 본문은 그를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고 부릅니다(눅 2:25). 그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으리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눅 2:26). 그리고 어느 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갑니다. 마침 한 가난한 부부가 산비둘기 제물을 들고 아기를 안고 들어옵니다(눅 2:24, 27). 노인은 그 아기를 받아 안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합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눅 2:30). 평생을 기다린 위로가 품 안에 있었습니다.
보십시오. 시므온이 기다린 위로는 좋은 기분이 아니었습니다. 품에 안을 수 있는 한 분이었습니다. 위로가 사람이라면, 위로는 흔들리는 내 마음이 아니라 그분이 누구신가에 달린 문제가 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도 바로 이 자리에서 시작합니다. 1563년, 전쟁과 박해의 시대에 태어난 이 문답은 첫 질문부터 한가한 교리 시험을 치르지 않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인생 전체를 걸 수 있는 위로가 있느냐고 묻습니다. 129개의 문답 전체가 오늘의 이 첫 질문 위에 서 있습니다.
제1문은 이렇게 묻습니다.
살아서나 죽어서나 당신의 유일한 위로는 무엇입니까?
살아서나 죽어서나, 그러니까 인생의 양쪽 끝을 다 덮는 위로를 묻습니다. 그리고 대답의 첫 문장이 이렇게 옵니다.
나의 유일한 위로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내가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몸도 영혼도 나의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대답이 ‘사실입니다’로 끝나는 것을 눈여겨보십시오. 문답은 위로를 감정이라 하지 않고 사실이라고 말합니다. 기분은 아침저녁으로 바뀌지만, 사실은 밤에도 그대로 남기 때문입니다. 그 사실의 이름이 ‘소속’입니다. 나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소속 말입니다. 오늘 이 사실을 두 걸음으로 걷겠습니다. 먼저 값을 치르고 나를 사신 분을, 그다음에 폭풍 속에서도 나를 세시는 분을 봅니다.
값을 치르고 나를 사신 분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보혈로 나의 모든 죄값을 완전히 치르셨고,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나를 해방하셨습니다.
문답은 소속의 근거를 값에서 찾습니다. 그냥 내 것이라 우기시는 것이 아니라, 값을 치르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이 값이 실제 거래로 등장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선지자 호세아의 집은 오래전에 무너졌습니다. 아내가 집을 나갔습니다. 다른 사랑을 따라갔고, 끝내 몸을 파는 자리까지 흘러갔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하나님의 명령이 떨어집니다. “너는 또 가서 타인의 사랑을 받아 음녀가 된 그 여자를 사랑하라”(호 3:1). ‘또 가서’라는 말이 아픕니다. 처음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호세아는 시장으로 갑니다. 아내를 데려오는 데 값이 필요했습니다. 본문은 그 값을 이렇게 적습니다. “내가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으로 나를 위하여 그를 사고”(호 3:2). 은만으로는 모자랐던 모양입니다. 지갑을 다 털고, 집에 있던 곡식 자루까지 얹어 값을 맞춥니다. 사람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선지자가, 자기 아내를, 돈을 주고 다시 삽니다.
웃을 수 없는 장면입니다. 하나님은 이 부끄러운 거래를 성경에 그대로 남기게 하셨습니다. 너희를 되사는 내 사랑이 꼭 이렇다는 것입니다. 체면을 접고, 값을 다 치르고, 집으로 데려오는 사랑입니다.
바울은 이 거래를 우리 일로 선언합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고전 6:19-20). 생각해 보면 우리는 평생 몸값을 올리려고 삽니다. 스펙으로, 실적으로, 평판으로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정반대의 소식을 전합니다. 몸값은 이미 치러졌다는 것입니다. 올리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치러졌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은과 보리가 아니라, 문답의 말대로 그리스도의 보혈로, 모든 죄값을, 완전히 치르셨습니다.
문답의 표현을 다시 보십시오. 보혈로, 모든 죄값을, 완전히 치르셨다고 했습니다. 일부가 아니라 모든 죄값이고, 할부가 아니라 완전한 지불입니다. 그래서 해방입니다. 마귀의 모든 권세에서 해방되었다는 말은 형편이 나아졌다는 말이 아니라 주인이 바뀌었다는 말입니다. 옛 주인인 죄가 청구서를 내밀어도 이제 지불인이 다릅니다. 이미 결제가 끝난 청구서는 협박이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내 것을 늘릴 때는 그렇게 불안하더니, 내가 그분의 것이 되고 나니 오히려 든든해집니다.
위로는 기분에서 오지 않고, 소속에서 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 된 여러분의 이번 한 주가, 값을 치르신 그 사랑 안에서 든든하기를 축복합니다.
폭풍 속에서도 나를 세시는 분
또한 하늘에 계신 나의 아버지의 뜻이 아니고서는 머리카락 하나도 내 머리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나를 보호하시며, 참으로 모든 것이 합력하여 나의 구원을 이루게 하십니다.
소속이 사실이라면, 질문이 하나 남습니다. 그 주인은 자기 것을 지키시는가. 문답은 보호의 단위를 머리카락이라고 답합니다. 이 대답이 실제 폭풍 속에서 증명된 밤이 있습니다.
죄수 바울을 태운 배가 지중해 한가운데서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납니다(행 27:14). 짐을 버리고, 배의 기구까지 버리고, 열나흘을 떠밀려 다녔습니다. 본문의 기록이 서늘합니다. “구원의 여망마저 없어졌더라”(행 27:20). 그 배 한가운데서 쇠사슬에 묶인 죄수가 일어나 말합니다.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밤에 곁에 서서 말했다는 것입니다(행 27:23).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항해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행 27:24). 바울의 확신은 뱃길 경험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속한 바’, 소속에서 나왔습니다.
그 와중에 사공들은 닻을 내리는 체하며 몰래 거룻배를 바다에 내립니다. 저희만 빠져나가려던 것입니다(행 27:30). 바다를 가장 잘 아는 사람들이 가장 먼저 희망을 버렸습니다. 그 배에서 가장 안전한 사람은 뱃사람이 아니라, 묶여 있는 죄수였습니다. 새벽이 올 무렵 바울은 열나흘을 굶은 사람들에게 음식을 권하며 말합니다. “너희 중 머리카락 하나도 잃을 자가 없으리라”(행 27:34). 그리고 이백칠십육 명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뭍에 올랐습니다(행 27:37, 44).
머리카락 하나. 하나님의 보호가 재는 단위가 이렇습니다. 폭풍을 없애 주시는 방식이 아니었습니다. 배는 끝내 깨어졌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세어서 지키셨습니다. 문답이 롬 8:28을 이어 받아 고백하는 그대로입니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합력은 폭풍이 없다는 약속이 아니라, 폭풍까지 쓰신다는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나에게 영생을 보증하시고, 이제부터 온 마음을 다해 그를 위하여 살도록 나를 준비시키십니다.
그리고 문답은 보증으로 끝맺습니다. 성령께서 내 안에서 영생을 보증하신다는 것입니다. 보증은 기분이 좋은 날에만 유효한 서류가 아닙니다. 서명하신 분이 살아 계신 한 효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이 위로는 흔들리는 내 손이 아니라, 치르신 값과 세시는 손과 취소되지 않는 보증 위에 서 있습니다.
폭풍은 항로를 바꾸어도, 소유주를 바꾸지 못합니다.
이번 주 여러분의 바다가 거칠어도,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그 손이 여러분을 붙드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래서 한 가지를 권합니다. 이번 주, 머리맡에 수첩 한 권을 두십시오. 불안이 마음을 두드리는 밤, 자기 전에 딱 두 줄만 쓰는 것입니다. 첫 줄은 문답의 첫 고백 그대로 씁니다. ‘나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것.’ 둘째 줄에는 오늘 나를 흔든 일 하나를 적습니다. 순서가 중요합니다. 흔든 일 위에 소속을 먼저 적어 두면, 마음이 그 순서를 배웁니다. 그렇게 쓴 수첩을 주일에 들고 와 기도 자리에 펴 놓으십시오. 일주일의 불안이 한 분의 소유 아래 정리되어 있을 것입니다. 한 가지 더 하실 수 있다면, 토요일 밤에는 그 주간의 둘째 줄들 가운데 하나를 골라 그 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한 줄을 덧붙여 보십시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손길은, 대개 지나간 자리에서 또렷해지기 때문입니다.
저는 내일 밤에도 제 것을 세고 있을지 모릅니다. ……
그러나 오늘, 한 문장이 제 움켜쥔 손을 폅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니라. 그분의 것. 살아서도. 죽어서도.
값은 치러졌습니다. 보혈로, 완전히. 폭풍은 맡겨졌습니다. 머리카락까지 세시는 분께. 그리고 성령께서 내 안에서 보증하십니다. 이 소속은 취소되지 않는다고. 사도의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됩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 14:8).
그래서 교리문답은 이것을 ‘유일한’ 위로라고 부릅니다. 다른 위로는 전부 빌린 것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나는 안전합니다.
묵상 질문
하나. 바울은 폭풍 한가운데서 ‘내가 속한 바 곧 내가 섬기는 하나님’이라고 말했습니다(행 27:23). 그 밤에 바울의 확신을 붙든 것은 항해 경험이 아니라 무엇이었습니까?
둘. 문답은 위로를 ‘사실입니다’라고 말합니다. 위로가 감정이 아니라 사실이라면, 감정이 무너진 날에도 위로가 남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셋. ‘내 것’이 늘어나면 안심이 되어야 할 텐데, 왜 우리는 가질수록 더 쥐게 되고, 쥘수록 더 흔들릴까요?
혼자 품으신 이 질문들을, 이번 주 소그룹에서는 워크북 2쪽의 나눔 질문으로 함께 이어 가십시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제 것을 세다가 밤이 깊었습니다. …… 오늘은 저를 세시는 주님 앞에 눕습니다. 값을 치르신 그 손에 제 이름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나 죽으나 주의 것으로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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