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만큼, 사랑합니다

행복하게 살고, 행복하게 죽는 법. 이런 제목의 책이 있다면 서점 어느 칸에 꽂혀 있을까요? 자기계발 칸일까요, 종교 칸일까요? 교리문답은 이 질문에 뜻밖의 대답을 내놓습니다. 비결 목록이 아니라 공부 목록입니다.

저는 은혜는 크게 듣고 싶고, 제 죄는 작게 듣고 싶습니다. 위로의 말씀 앞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다가도, 찔리는 말씀 앞에서는 슬그머니 다른 사람의 얼굴을 떠올립니다. ……

성경에도 병은 고치고 싶은데 병은 작게 여기고 싶었던 사람이 있습니다. 아람의 군대 장관 나아만입니다. 성경은 그를 큰 용사이나 나병환자라고 소개합니다(왕하 5:1). 그가 말들과 병거들을 거느리고 엘리사의 집 문 앞에 섭니다(5:9). 말발굽 소리가 좁은 골목을 가득 채웠을 것입니다. 그런데 선지자는 문밖으로 나오지도 않습니다. 사자를 보내 요단 강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고만 전합니다(5:10).

나아만이 화를 내며 속마음을 털어놓습니다.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왕하 5:11). 장군은 대본을 써 왔던 것입니다. 선지자가 나오고, 이름을 부르고, 손을 흔드는 장면까지 다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대본에는 자기가 강물에 들어가는 장면이 없었습니다.

나아만이 몰랐던 것은 요단 강의 효능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병의 크기였습니다. 병을 작게 아는 사람에게는 처방도 모욕처럼 들립니다.

제1문은 우리의 유일한 위로를 고백했습니다. 몸도 영혼도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위로입니다. 제2문은 곧바로 그 위로를 누리는 길을 묻습니다.

이 위로 안에서 행복하게 살고 죽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대답은 짧습니다.

세 가지입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큰가. 둘째, 어떻게 나의 모든 죄와 비참에서 구원받는가. 셋째, 그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리는가.

위로는 기분 위에 서지 않고 앎 위에 섭니다. 그런데 그 앎에는 순서가 있습니다. 첫째, 둘째, 셋째. 오늘은 이 세 칸을 두 걸음으로 걷겠습니다. 먼저 첫째와 둘째가 왜 한 몸처럼 붙어 있는지 보고, 그다음에 셋째가 어디서 흘러나오는지 보겠습니다.

비참을 아는 눈이 구원을 봅니다

문답은 먼저 이렇게 말합니다.

첫째, 나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큰가. 둘째, 어떻게 나의 모든 죄와 비참에서 구원받는가.

선지자 나단이 다윗의 왕궁에 들어섭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셨습니다(삼하 12:1). 그런데 나단은 죄목을 읽지 않고 이야기를 하나 꺼냅니다. 한 성읍에 양과 소가 많은 부자와,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인 가난한 사람이 살았습니다. 그 양은 가난한 사람의 품에 누워 자며 딸처럼 자랐습니다(12:3). 그런데 부자가 손님을 대접하면서 자기 양은 아끼고 그 양 새끼를 빼앗아 잡았습니다(12:4).

다윗의 얼굴이 달아오릅니다. 왕이 판사석에 앉은 것입니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12:5). 판결이 빠릅니다. 배상액까지 정합니다. 네 배로 갚아야 한다는 것입니다(12:6). 남의 죄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유능한 판사인지요.

그때 나단이 한 문장으로 법정을 뒤집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12:7). 판사석이 피고석이 되는 데 걸린 시간은 단 한 문장이었습니다. 다윗의 대답도 짧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12:13). 그리고 그 고백 바로 뒤에 나단의 말이 이어집니다. “여호와께서도 당신의 죄를 사하셨나니”(12:13).

첫째 칸에는 ‘나의’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죄 일반이 아니라 나의 죄입니다. 다윗은 죄를 몰랐던 사람이 아닙니다. 율법도 알았고 형량도 알았습니다. 그가 몰랐던 것은 그 죄가 자기 것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둘째 칸은 ‘어떻게’를 묻습니다. 구원은 내 결심의 크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신 방법의 문제라는 뜻입니다.

다윗이 들은 사죄 선언은 거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다윗을 다시 불러냅니다.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롬 4:6). 다윗이 받은 용서는 다윗이 무언가를 해서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디도서는 그 용서가 어디서 왔는지 밝힙니다.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딛 3:4)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자비가 사람의 얼굴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다윗의 자손으로 오신 그분이 다윗의 죄까지 지고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비참을 모르는 사람에게 구원은 지나친 친절처럼 보입니다. 비참을 아는 사람에게 구원은 숨입니다. 그래서 첫째 칸과 둘째 칸은 떨어지지 않습니다.

비참을 아는 눈이 구원을 보는 눈입니다.

구원을 아는 마음이 감사로 넘칩니다

이제 문답은 세 번째 앎으로 넘어갑니다.

셋째, 그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어떻게 감사를 드리는가.

한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식사에 청합니다(눅 7:36). 이름은 시몬입니다. 손님들이 자리에 앉았을 때, 초대받지 않은 한 여자가 들어옵니다. 성경은 그를 “그 동네에 죄를 지은 한 여자”라고 부릅니다(7:37). 손에는 향유 담은 옥합이 들려 있습니다. 방 안에 향이 퍼집니다. 여자는 예수님의 발 곁에 서서 웁니다. 눈물로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닦고,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습니다(7:38).

시몬은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속으로 말합니다.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어떤 자인지 알았을 것이라고(7:39). 그런데 예수님은 그 속말에 대답하십니다(7:40). 속으로 한 말에 대답을 들은 집주인의 표정을 상상해 보십시오. 음식이 목에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은 빚진 두 사람 이야기를 하십니다. 오백 데나리온 진 자와 오십 데나리온 진 자가 둘 다 탕감을 받았습니다(7:41-42). 누가 더 사랑하겠느냐는 물음에 시몬은 정답을 말합니다. “내 생각에는 많이 탕감함을 받은 자니이다”(7:43). 그러자 예수님은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의 집을 한 바퀴 돌아 보이십니다. 너는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고, 입맞추지도 않았고,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고 하십니다(7:44-46). 시몬은 정답은 맞혔는데, 대접은 빵점이었습니다.

셋째 칸은 감사가 있느냐고 묻지 않습니다. ‘어떻게’ 감사를 드리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이 그 방향을 가리킵니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7:47). 시몬의 감사가 작았던 것은 그의 죄가 작아서가 아니었습니다. 자기 빚을 작게 계산했기 때문입니다. 감사를 빚 갚기로 오해하면 감사는 늘 모자랍니다. 시편 기자도 묻습니다.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시 116:12). 그리고 바로 다음 절에서 그는 무언가를 갚지 않습니다.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며”(116:13). 갚을 수 없는 은혜 앞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잔을 받아 드는 일입니다.

이 장면의 중심에는 여자의 눈물이 아니라 예수님의 선언이 있습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7:48). 여자가 사랑해서 용서를 산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끝에서 분명히 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7:50). 용서가 먼저이고 사랑은 그 열매입니다. 그 용서를 선언하실 권세를 가진 분이 시몬의 식탁에 앉아 계셨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 빚을 장부에서 지워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친히 값을 치르셨습니다.

그러니 감사는 착한 사람의 성품이기 전에, 탕감받은 사람의 숨결입니다. 은혜를 크게 아는 만큼 감사도 깊어집니다.

감사는 갚는 손이 아니라, 잔을 드는 손입니다.

내 허물을 알면서도 덮어 준 사람이 떠오르십니까? 혼날 줄 알았는데 웃어 넘겨 준 부모님일 수도 있고, 내 실수를 대신 수습해 준 동료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사람에게는 고맙다는 말이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 말을 꺼내면 내 허물도 함께 꺼내야 하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한 달 안에 그 사람 한 명에게 고맙다는 말을 선물로 건네 보십시오. “그때 덕분에 제가 살았습니다.” 이 정도의 짧은 문장이면 충분합니다. 문자로 보내도 좋고,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말해도 좋습니다. 누구에게 무엇을 건넬지는 워크북 3쪽에 적어 보십시오. 그 한 문장이 상대에게 닿았다면, 이 한 달의 몫은 다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저녁 식탁에서는 숟가락을 들기 전에 삼 초만 멈추고, 이 밥상을 차려 준 사람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러 보십시오.

저는 오늘도 제 비참을 작게 말하고 싶은 사람입니다. 나아만처럼, 손 한 번 흔들어 주는 은혜를 기다립니다. ……

그런데 문답은 순서를 바꾸지 않습니다. 비참. 구원. 감사.

비참만 알면, 절망입니다. 구원만 말하면, 값싼 위로입니다. 감사만 흉내 내면, 연기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우리보다 정확히 아시고, 그 죄보다 크게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우리의 빚 장부를 닫았습니다. 이 세 가지를 알 때, 위로는 비로소 위로가 됩니다.

성도 여러분, 많이 탕감받은 자의 자리에서 많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 사랑합니다.

묵상 질문

이 질문을 마친 뒤에는 워크북 2쪽의 나눔 질문으로 이어 가십시오.

1. 디도서 3장 3절은 “우리도 전에는”으로 시작하고, 4절은 “나타날 때에”로 이어집니다. 바울은 왜 자기 자신을 3절의 명단에서 빼지 않았을까요?

2. 제2문은 감사를 느낌이 아니라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의 목록에 넣습니다. 감사가 앎의 목록에 들어 있다는 사실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3. ‘죄를 먼저 말하는 복음은 사람을 우울하게 만든다’는 반론에, 나단과 다윗의 장면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기도

아버지, 제 빚을 작게 적어 온 손을 내려놓습니다. …… 다윗에게 들려주신 그 말씀을 오늘 저에게도 들려주십시오. 그리고 탕감받은 사람답게, 구원의 잔을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게 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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