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3문 — 거울 앞에 서는 용기

사람의 눈은 참 많은 것을 봅니다. 먼 산도 보고, 남의 옷깃에 묻은 얼룩도 금세 찾아냅니다. 그런데 이 눈이 끝내 보지 못하는 얼굴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내 얼굴입니다. 거울 없이 자기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내 영혼의 얼굴은 무엇으로 볼 수 있을까요?

건강검진 결과지를 받아 들면, 많은 분이 숫자보다 ‘정상’이라는 두 글자를 먼저 찾지 않습니까? 빨간 글씨는 슬쩍 건너뛰고 싶습니다. 저는 제 영혼의 결과지도 그렇게 읽고 싶은 사람입니다. 잘한 일은 굵은 글씨로 읽고, 잘못한 일은 각주처럼 작게 읽고 싶습니다.

성경에도 자기 결과지를 ‘정상’으로 읽은 교회가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입니다. 그 교회는 스스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 3:17). 그런데 주님의 진단은 정반대였습니다.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3:17). 부족한 것이 없다던 교회가 실은 입을 옷도 없었습니다. 벌거벗은 채로 자기 옷장을 자랑한 셈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처방을 내리십니다.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3:18).

라오디게아의 문제는 가난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가난한 줄 모르는 것이었습니다. 아픈 것보다 더 위험한 것은, 아픈 줄 모르는 것입니다.

제2문은 위로를 누리려면 먼저 나의 죄와 비참이 얼마나 큰지 알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제3문은 바로 그 첫째 칸의 문을 엽니다.

당신의 비참을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대답은 한 줄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입니다.

내 비참을 아는 자리는 내 기분도 아니고, 남의 평가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입니다. 오늘은 이 한 줄을 두 걸음으로 따라가 보겠습니다. 먼저 율법이 어떻게 내 죄를 드러내는 거울이 되는지 보고, 그다음에 그 거울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가는지, 곧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자리를 보겠습니다.

남이 아니라 율법이 나를 비춥니다

문답은 먼저 이렇게 묻습니다.

당신의 비참을 어디서 알 수 있습니까?

‘어디서’라는 물음 앞에서 우리는 대개 엉뚱한 곳으로 갑니다. 바로 옆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갑니다. 하나는 바리새인이고, 하나는 세리입니다(눅 18:10). 성전 뜰은 기도하는 사람들의 소리로 웅성거렸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합니다(18:11).

그의 기도를 들어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18:11). 이어서 자기 이력을 읽어 내려갑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18:12). 기도라기보다 자기소개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이 자기소개서에는 이상한 점이 하나 있습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것이 한 가지도 없습니다. 부족한 것이 없으니 구할 것도 없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그가 고른 비교 대상은 하필 몇 걸음 뒤에 서 있는 세리였습니다. 기도하다 말고 곁눈질로 순위를 매긴 셈입니다.

세리는 멀리 서서 눈을 들지도 못합니다. 가슴을 치며 한 문장만 드립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18:13). 바리새인은 세리를 거울로 삼았고, 세리는 하나님 앞에 섰습니다. 거울이 달랐기에 보인 얼굴도 달랐습니다.

비교라는 거울은 늘 우리 편입니다. 나보다 못해 보이는 사람을 골라 세우면 언제든 나는 괜찮은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그렇게 골라 세울 수 있는 거울이 아닙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 3:20). 바울 자신이 그 증인입니다. 그는 한때 바리새인이었고, 스스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말할 만큼 자신 있던 사람입니다(빌 3:5-6). 손과 발로 지키는 계명이라면 그는 늘 합격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계명 앞에서 그 성적표가 무너집니다.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 7:7). 탐심은 손에 묻지 않고 마음에 묻는 죄입니다. 남과 견주어서는 결코 보이지 않는 얼룩입니다. 율법은 그 얼룩까지 비춥니다.

그런데 이 비유를 들려주신 분이 누구신지 기억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이야기 끝에 판정을 내리십니다. “이에 저 바리새인이 아니고 이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느니라”(눅 18:14). 자기 비참을 고백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바울도 같은 길을 걷습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하신 하나님께서 바로 이어 길을 여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율법이 비참을 드러내는 그 자리에, 그리스도께서 의를 들고 서 계십니다.

그러니 율법의 거울 앞에 서는 일은 수치를 당하는 일이 아니라, 내 진짜 얼굴을 찾는 일입니다. 남과 견주어 얻은 안심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나보다 나은 사람이 곁에 서는 순간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비교는 나를 위로하고, 율법은 나를 진단합니다.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데려갑니다

이제 문답의 대답을 다시 읽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비참을 아는 길을 율법에 두셨을까요? 우리를 부끄럽게 하시려는 것일까요?

요시야 왕 열여덟째 해, 예루살렘 성전에 망치 소리가 울립니다. 왕은 목수와 건축자와 미장이를 들여 부서진 성전을 고치게 합니다(왕하 22:5-6). 돌가루와 먼지 사이에서 대제사장 힐기야가 무언가를 찾아냅니다. “내가 여호와의 성전에서 율법책을 발견하였노라”(22:8).

서기관 사반이 왕에게 보고하러 갑니다. 그런데 보고 순서가 재미있습니다. 먼저 돈 이야기를 합니다. 성전에서 찾아낸 돈을 감독자들에게 잘 맡겼다는 것입니다(22:9). 회계 보고를 다 마치고 나서야 덧붙입니다. “제사장 힐기야가 내게 책을 주더이다”(22:10). 나라의 운명을 바꿀 책이 회계 보고 끝에 추신처럼 따라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집 안에서 그만큼 잊혀 있었습니다.

사반이 왕 앞에서 그 책을 읽습니다. 본문은 짧게 적습니다. “왕이 율법책의 말을 듣자 곧 그의 옷을 찢으니라”(22:11). 거울에 비친 나라의 얼굴을 본 것입니다. 그러나 요시야는 거울 앞에서 주저앉지 않습니다. 곧바로 사람들을 보내 여호와께 묻게 합니다(22:13). 그리고 하나님의 대답이 돌아옵니다.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22:19). 율법이 찢어 놓은 마음을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율법은 비참을 보여 주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 목적을 이렇게 밝힙니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갈 3:24). 옛 번역은 이 초등교사를 몽학선생이라 불렀습니다. 바울 당시 이 사람은 아이를 직접 가르치기보다 아이의 손을 잡고 선생에게 데려다주는 일을 했다고 설명하는 학자들이 많습니다. 그의 일은 아이를 목적지에 데려다 놓는 것입니다. 율법의 일도 그렇습니다. 율법은 우리를 붙잡아 두려고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 손을 잡아 그리스도께 넘겨주려고 주어졌습니다.

요시야가 들은 응답은 한 왕의 겸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응답이 영원히 무너지지 않을 근거는 다른 곳에 있습니다. 율법이 요구한 모든 것을 끝까지 이루신 분이 오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롬 10:4). 율법이 우리를 데려다 놓는 자리는 텅 빈 법정이 아닙니다.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려고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 앞입니다(갈 3:13).

그러니 율법 앞에서 옷을 찢는 일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거울은 얼굴의 얼룩을 보여 줄 수는 있어도, 그 얼룩을 지워 줄 수는 없습니다. 거울로 얼굴을 문지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씻는 일은 그리스도께서 하십니다.

율법은 거울이지, 비누가 아닙니다.

토요일 밤, 내일 입을 옷을 꺼내 놓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 옆에 십 분을 더 놓아 보십시오. 휴대폰 알람을 매주 그 시간에 맞추고, 알람 이름을 ‘거울’이라고 붙여 두는 것입니다. 알람이 울리면 출애굽기 20장을 펴고 계명을 한 줄씩 천천히 읽어 내려가십시오. 읽다가 마음이 걸려 멈추는 줄이 있을 것입니다. 그 줄에 손가락을 얹고, 그 계명 앞에서 걸린 일 하나를 이름 붙여 하나님께 말씀드리며 용서를 청하십시오. 한 주에 한 줄이면 충분합니다. 그러면 주일 아침 예배당 문을 열 때, 그 한 줄이 이미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알고 들어서게 됩니다. 한 해 하고 마는 일이 아니라, 평생 지니고 갈 습관입니다.

그리고 오늘 밤 수건으로 얼굴을 닦을 때, 오늘 한 말 가운데 누군가에게 상처를 남긴 말이 있었다면 그 말을 들은 사람의 이름을 입속으로 한 번 불러 보십시오.

저는 지금도 결과지의 빨간 글씨를 건너뛰고 싶은 사람입니다. 남의 얼굴은 잘 보이는데, 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습니다.

라오디게아는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바리새인은 구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옷을 찢은 왕은 응답을 들었고, 가슴을 친 세리는 의롭다 하심을 받았습니다. 거울을 피한 사람은 그대로 돌아갔고, 거울 앞에 선 사람은 다른 사람이 되어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우리를 수치 속에 버려두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데려가시려는 것입니다. 율법이 비춘 얼룩을,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로 씻으십니다.

성도 여러분, 율법의 거울 앞에서 도망치지 마십시오. 그 앞에 정직하게 서서, 그 거울이 가리키는 그리스도께로 걸어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거울 앞에 선 사람만이, 씻긴 얼굴로 집에 돌아갑니다.

묵상 질문

1. 사반은 왕에게 먼저 돈을 보고하고 나서야 율법책 이야기를 꺼냅니다(왕하 22:9-10). 지금 내 삶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추신처럼 뒤로 밀려나 있는 자리는 어디입니까?

2. 제3문은 비참을 아는 곳을 내 양심이나 경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이라고 대답합니다. 비참을 재는 자가 내 안이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은 왜 중요합니까?

3. ‘율법을 강조하면 사람을 정죄하고 율법주의로 몰아간다’는 반론에, 갈라디아서 3장 24절은 어떻게 대답합니까?

기도

거룩하신 아버지, 남의 얼굴로 제 얼굴을 가리던 손을 내립니다. 주의 율법 앞에 정직하게 서게 하십시오. 그 거울이 비춘 얼룩을 그리스도의 피로 씻어 주십시오. 그리고 씻긴 얼굴로 주님을 바라보게 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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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 비참과 구속 (1~64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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