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1:21 강해 — 인생 공식의 빈칸, 무엇을 넣으셨나요

빌립보서 1:21은 죽음을 미화하는 말이 아니라, 삶의 중심을 그리스도께 둔 사람만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사는 것의 자리에 무엇을 두느냐에 따라 죽음의 의미가 정해집니다. 성공을 두면 죽음은 모든 것을 잃는 날이 됩니다. 그리스도를 두면 죽음조차 그분께 더 가까이 가는 날이 됩니다.

저는 오랫동안 ‘다음’을 위해 살았습니다. 이 시험만 지나면, 이 자리만 얻으면, 이 일만 끝나면. 그런데 이상했습니다. 하나를 손에 쥐면 그 기쁨은 생각보다 빨리 식었습니다. 그 자리에 또 다른 ‘다음’이 들어와 앉았습니다. 결승선인 줄 알았던 곳이 다음 출발선이었습니다. 그러다 문득 무서운 질문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달리다가 끝나는 날이 오면, 나는 무엇을 들고 가는가.

당신은 어떻습니까. 지금 당신을 아침에 일으키는 그것은 당신이 죽는 날에도 의미가 있습니까?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빌립보서 1:21, 성경: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이 고백은 감옥에서 쓰였다

이 편지를 쓸 때 바울은 갇혀 있었습니다. 그는 자기 상황을 “나의 매임”이라고 부릅니다(1:13). 로마 황제의 친위대인 시위대가 그의 사정을 알 정도였습니다. 재판의 결과는 아무도 몰랐습니다. 풀려날 수도 있었고 처형될 수도 있었습니다.

게다가 바깥 소식도 좋지 않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갇힌 틈을 타서 경쟁하듯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은 그들이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1:17) 움직인다고 말합니다. 사역자로서의 명성도, 영향력도 흔들리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반응이 놀랍습니다.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1:18). 자기 이름이 지워져도 괜찮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만 높아진다면.

이 흐름 위에서 바울은 자기 소원을 밝힙니다.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1:20). 그리고 그 이유를 21절에서 한 줄로 내놓습니다. “이는”이라는 연결어가 앞의 소원과 뒤의 고백을 묶습니다. 21절은 갑자기 튀어나온 명언이 아닙니다. 감옥과 경쟁과 죽음의 가능성 한가운데서 길어 올린 고백입니다.

동사도 없이 놓인 두 개의 등식

헬라어 원문은 이렇습니다. Ἐμοὶ γὰρ τὸ ζῆν Χριστὸς καὶ τὸ ἀποθανεῖν κέρδος. 이 문장에는 ‘이다’에 해당하는 동사가 없습니다. 사는 것, 그리스도. 죽는 것, 유익. 수식어도 설명도 없이 두 개의 등식이 나란히 서 있습니다. 군더더기를 다 걷어 낸 문장은 오히려 더 단단합니다.

맨 앞에 놓인 말도 눈여겨볼 만합니다. ‘에모이'(Ἐμοὶ), 곧 ‘나에게는’입니다. 헬라어에서 문장 맨 앞자리는 힘이 실리는 자리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살든, 다른 전도자들이 어떤 마음으로 움직이든, 나에게는 이것이라는 선언입니다.

또 하나는 ‘유익’으로 번역된 ‘케르도스'(κέρδος)입니다. 이 단어는 원래 장사에서 남는 이익을 가리킵니다. 손익을 따지는 장부의 언어입니다. 바울은 죽음을 장부에 올려놓고 계산합니다. 그리고 결론을 적습니다. 손해가 아니라 이익이라고. 세상이 가장 큰 손실로 적는 칸에 바울은 흑자를 적어 넣었습니다.

빈칸에 무엇을 넣느냐가 결론을 바꾼다

21절을 하나의 공식으로 읽어 보십시오. 사는 것은 ○○이다. 그러므로 죽는 것은 □□이다. 앞의 빈칸이 뒤의 빈칸을 결정합니다.

사는 것이 성공이라면 어떻게 될까요. 죽는 것은 실패입니다. 쌓아 온 경력이 거기서 멈춥니다. 사는 것이 돈이라면 죽는 것은 파산입니다. 한 푼도 들고 갈 수 없습니다. 사는 것이 사람들의 인정이라면 죽는 것은 잊힘입니다. 장례식이 끝나면 세상은 금방 다음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여기서 하나가 분명해집니다. 세상이 내미는 거의 모든 빈칸은 죽음 앞에서 손해로 끝납니다. 성공 중심의 인생관이 결국 불안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아무리 많이 쌓아도 마지막 장부는 적자로 마감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의 예외가 있습니다. 앞의 빈칸에 그리스도를 넣을 때입니다. 사는 이유가 그리스도라면 죽음은 그분을 잃는 일이 아닙니다. 그분께 더 가까이 가는 일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1:23). 죽음이 유익인 이유는 죽음 자체가 좋아서가 아닙니다. 그 너머에 그리스도가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바울이 삶을 가볍게 여긴 것은 아닙니다. 그는 곧바로 고민합니다.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1:23). 그리고 결론을 내립니다.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1:24). 바울은 자기에게 더 좋은 것을 내려놓고 남에게 더 좋은 쪽을 택합니다.

이것이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 사람의 모습입니다. 그는 삶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삶에서 도망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남은 시간을 남을 위해 씁니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사람이 가장 담대하게 살아갑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구절을 어떻게 읽으실까

우리는 보통 이 구절을 다짐의 자리에서 읽습니다. 나도 바울처럼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겠다고. 좋은 다짐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을 예수님 곁에 세워 보면 방향이 뒤집힙니다.

바울에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였다면, 그리스도께는 무엇이 사는 이유였을까요. 예수님은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을 자기 양식이라고 하셨습니다(요 4:34). 그리고 그 뜻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내놓는 길이었습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바울은 죽음을 자기 장부에서 이익으로 계산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예 자기 장부를 펴지 않으셨습니다. 양들의 목숨을 위해 자기 목숨이라는 가장 큰 손해를 통째로 떠안으셨습니다.

십자가를 앞둔 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도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요 16:7). 우리말 성경은 여기서도 ‘유익’이라는 말로 옮겼습니다. 헬라어로는 케르도스가 아니라 다른 단어 συμφέρει(쉼페레이)입니다. 번역어가 같을 뿐이지만, 그 겹침이 우리를 멈춰 세웁니다. 예수님의 떠나가심은 십자가와 부활과 승천을 거쳐 아버지께 가시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 끝에서 보혜사 성령을 보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16:7). 그 떠나가심은 제자들에게 이별의 슬픔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들을 위한 유익이었습니다.

그러니 순서가 바뀝니다. 우리가 먼저 그리스도를 삶의 중심에 두기로 결심한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먼저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리셨고, 다시 사셨고, 아버지께 가셔서 성령을 보내셨습니다. 바울이 너희를 위해 사는 쪽을 택한 것도 사실 작은 메아리였습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분의 사랑이 먼저 울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편지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는 말은 내가 열심히 짜낸 인생 목표가 아닙니다. 나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분이 이제 성령으로 내 안에 사신다는 사실의 다른 표현입니다.

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

이 구절 뒤에는 생명보다 더 귀하신 하나님이 서 계십니다. 시편 기자는 “주의 인자하심이 생명보다 나으므로”(시 63:3)라고 노래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붙드는 어떤 것보다 크시기에, 그분을 붙든 사람은 생명을 잃어도 잃지 않습니다.

또 하나님은 삶과 죽음을 모두 다스리시는 주권자이십니다. 감옥에 갇힌 바울을 통해서도 복음을 진전시키셨습니다(1:12). 바울의 실패처럼 보이는 자리가 하나님의 일하심의 자리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끝까지 놓지 않으시는 신실한 분입니다. 살아도 그분 손 안이고 죽어도 그분 손 안입니다. 그래서 죽음은 끝이 아니라 그분과 더 가까워지는 문이 됩니다.

오늘 내 빈칸을 정직하게 들여다보기

먼저 종이 한 장을 꺼내 보십시오. 그리고 이렇게 적으십시오. 나에게 사는 것은 ○○이다. 머리로 아는 정답 말고 실제 답을 쓰십시오. 내 시간과 돈과 걱정이 가장 많이 흘러가는 곳이 진짜 답입니다. 지난 한 주의 일정표와 결제 내역을 펼쳐 보면 금방 보입니다.

그다음 그 빈칸 뒤에 질문을 하나 붙이십시오. 그렇다면 내게 죽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답이 손해라면, 당신은 지금 언젠가 반드시 잃을 것을 위해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은 정죄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방향을 다시 잡으라는 초대입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 내릴 결정 하나를 골라 1:20의 질문으로 비추어 보십시오. 이 선택이 내 몸에서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하는가. 거창한 결정일 필요는 없습니다. 퇴근 후의 한 시간, 누군가에게 보낼 메시지 하나면 충분합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이 남기로 한 이유를 기억하십시오.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였습니다(1:25). 이번 주 당신의 시간 중 일부를 다른 사람의 믿음을 위해 떼어 두십시오. 지친 지체에게 안부를 묻는 일도 좋습니다.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 사람은 결국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됩니다.

성공은 죽음 앞에서 끝납니다.

그리스도는 죽음 너머에서 기다리십니다.

소그룹 나눔

  • ① 정직하게 적어 본 ‘나에게 사는 것은 ○○이다’의 빈칸에는 무엇이 들어갔습니까?
  • ② 바울은 경쟁자들 때문에 자기 이름이 가려져도 그리스도가 전파되니 기뻐했습니다. 내가 인정받지 못할 때 기뻐하기 어려운 이유는 무엇입니까?
  • ③ 바울은 자기에게 더 좋은 길보다 다른 사람에게 더 유익한 길을 택했습니다. 내 삶에서 그런 선택이 필요한 자리는 어디입니까?
  • 한 주 나눔 과제: 매일 저녁 그날의 결정 하나를 떠올리며 ‘이 선택이 그리스도를 존귀하게 했는가’를 한 줄로 적고, 다음 모임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한 줄을 나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사는 것이 그리스도라면 꿈이나 성공을 추구하면 안 되나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일하고 계획하고 사람을 세우는 데 온 힘을 쏟은 사람입니다. 문제는 성공 그 자체가 아니라 성공이 빈칸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1문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답합니다. 꿈과 일은 이 목적을 섬길 때 제자리를 찾습니다. 그리스도가 중심에 계시면 성공은 도구가 되고, 실패도 끝이 아니게 됩니다.

Q2. 죽는 것이 유익이라면, 삶이 너무 힘들어 죽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도 괜찮은 건가요?

바울의 고백은 삶에서 도망치려는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사모하면서도 다른 사람을 위해 살기로 택했습니다(1:24-25).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가, 내가 나의 것이 아니요 몸과 영혼이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사실이라고 고백합니다. 당신의 생명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지금 당신이 살아 있기를 원하십니다. 만약 죽고 싶은 마음이 계속된다면 혼자 견디지 마십시오. 자살예방상담전화 109에 전화하거나 가까운 정신건강 전문가와 목회자에게 꼭 도움을 구하십시오. 도움을 구하는 것은 믿음이 약하다는 증거가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Q3. 바울처럼 고백하지 못하는 저는 믿음이 없는 걸까요?

바울의 고백은 출발점이 아니라 오랜 걸음의 열매였습니다. 그리고 그 고백의 근거는 바울의 열심이 아니라 그를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5문은 성화를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사역으로 고백합니다. 그 은혜로 우리가 점점 더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된다고 말합니다. 오늘 이 고백이 낯설어도 괜찮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 안에서 그 빈칸을 조금씩 채워 가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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