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2:5-8은 하나님이 얼마나 낮은 곳까지 내려오셨는지를 보여 주는 복음이며, 그 복음이 우리 마음의 방향을 바꾸라는 부르심입니다. 바울은 다투는 교회에 도덕 규칙을 내밀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자기를 비우신 그분의 마음이 우리 안에 자리 잡을 때, 낮아짐은 손해가 아니라 가장 단단한 힘이 됩니다.
저는 일을 마치고 보고할 때마다 묘한 유혹을 느낍니다. 함께 해낸 일인데도 제 몫을 한 줄 더 적고 싶어집니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을 슬쩍 덧붙입니다. 알아주지 않으면 제 수고가 사라질 것 같아서입니다.
요즘은 이것을 자기 PR이라고 부릅니다. 드러내지 않으면 없는 사람 취급을 받는 시대입니다. 가만히 있으면 밀리고, 양보하면 만만한 사람이 됩니다. 그런데 이 시대 한복판에 빌립보서 2장이 놓여 있습니다. 올라가라고 하지 않고 내려가라고 말하는 본문입니다. 정말 그 길이 사는 길일까요. 당신이 이길 수 있던 자리를 스스로 내려놓은 것은 언제가 마지막이었습니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빌립보서 2:5-8, 성경: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금이 간 교회에 바울은 한 편의 노래를 들려주었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이 유난히 아끼던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에 금이 가고 있었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두 여성 일꾼에게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부탁합니다(4:2). 이름이 거론될 만큼 갈등이 드러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2장은 처방으로 시작합니다. “한마음을 품어”(2:2). 그리고 뿌리를 짚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2:3). 교회를 갈라놓는 것은 교리 논쟁보다 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라는 진단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훈계를 더 쌓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보여 줍니다. 6절부터 11절까지는 문장의 결이 다릅니다. 짧은 구절들이 리듬을 타며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갑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 부분을 초대교회가 부르던 찬송으로 봅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이미 부르던 노래를 펼쳐 놓고 묻는 셈입니다. 이 노래대로 살고 있느냐고.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행 16:12). 로마 시민권은 그 도시의 자랑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직함과 명예를 좇아 사다리를 한 칸씩 올랐습니다. 그 도시 한가운데서 사다리를 거꾸로 내려가신 분의 노래가 불렸습니다.
빈 영광으로 부풀린 사람, 스스로 비우신 분
“자기를 비워”(2:7)는 헬라어로 ‘에케노센'(ἐκένωσεν)입니다. 뿌리는 ‘빈’이라는 뜻의 ‘케노스'(κενός)입니다. 그런데 이 뿌리가 바로 앞에서 한 번 나왔습니다. 3절의 “허영”이 ‘케노독시아'(κενοδοξία), 글자 그대로 빈 영광입니다.
바울은 같은 뿌리의 단어를 일부러 나란히 놓습니다. 우리는 빈 영광으로 자신을 부풀립니다. 풍선처럼 커 보이지만 속은 비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정반대입니다. 영광으로 충만하신 분이 스스로를 비우셨습니다. 우리는 비어 있어서 부풀리고, 그분은 충만하셔서 비우셨습니다.
바울은 무엇을 비우셨는지 목록을 주지 않습니다. 곧바로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라고 말합니다. 비우심은 빼기가 아니라 더하기였습니다. 하나님이기를 그만두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신 분이 사람의 본성을 입으시고 영광을 드러낼 권리를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또 하나는 ‘모르페'(μορφή)입니다. “하나님의 본체”(2:6)와 “종의 형체”(2:7)에 같은 단어가 쓰였습니다. 모르페는 겉모습이 아니라 속의 실제 본질이 드러난 형태를 말합니다. 하나님으로서 진짜이셨던 분이 종으로서도 진짜이셨습니다. 종의 옷을 빌려 입은 연기가 아니었습니다.
움켜쥐는 손과 펴는 손
그리스도는 이미 가지신 하나님과의 동등됨을 자기 이익을 위해 움켜쥘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습니다(2:6). 이 장면은 동산의 첫 사람과 겹칩니다. 아담은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말에 손을 뻗었습니다(창 3:5). 갖지 못한 것을 움켜쥐려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가지신 것을 펼치셨습니다. 인류는 움켜쥐는 손으로 무너졌고, 펴신 손으로 다시 세워졌습니다.
본문의 동사를 따라 내려가 봅시다.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시고,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십니다. 계단은 끝없이 아래로 이어집니다. 그리고 마지막 한마디가 떨어집니다.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2:8).
바닥 아래의 바닥입니다. 십자가는 노예와 반역자에게 내려지던 형벌이었습니다. 시민권을 자랑하던 빌립보 사람들에게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지는 죽음이었습니다. 하나님이 거기까지 내려가셨습니다.
이것이 어떻게 힘입니까. 움켜쥘 필요가 없는 분만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자기 PR은 대개 불안의 언어입니다. 증명하지 않으면 존재가 사라질 것 같을 때 우리는 목소리를 높입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증명할 필요가 없는 마음입니다. 아버지 앞에서 이미 확실하셨기에 가장 낮은 자리로 걸어가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9절이 이어집니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2:9). 그분은 스스로를 높이지 않으셨습니다. 높이신 분은 아버지였습니다. 자기를 알리는 일을 아버지께 맡긴 마음. 그것이 진짜 힘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구절을 어떻게 읽으실까
우리는 이 구절을 숙제처럼 읽습니다. 나도 낮아져야 하는데 왜 이렇게 안 될까. 겸손의 기준표 앞에서 또 한 번 낙제점을 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이 본문은 숙제가 아니라 당신이 걸어오신 길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누가 있었는지 아십니다. 바로 우리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겸손의 모범을 보여 주려고만 내려오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찾으러 내려오셨습니다. 제자들이 누가 크냐며 다투던 그 밤에도 그분은 수건을 두르고 그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요 13:4-5).
자리를 바꿔 보십시오. 이 본문에서 당신은 먼저 낮아져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그분이 낮아지셔서 찾아오신 사람입니다. 십자가 아래까지 내려오신 그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비로소 내려갈 용기를 얻습니다. 겸손은 노력으로 쥐어짜는 것이 아니라 받은 사랑이 흘러넘치는 것입니다.
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
이 본문의 하나님은 멀리서 명령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직접 내려오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위대함은 높은 곳에 머무시는 데서보다 낮은 곳까지 오시는 데서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또 하나님은 자기를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아들은 아버지께 끝까지 순종하셨고, 아버지는 그 아들을 높이셨습니다. 내어주는 사랑과 높이시는 신실하심이 한 이야기 안에 함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낮아짐을 결코 헛되게 버려두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이번 주, 한 줄을 지우는 연습
이번 주에 보고서나 대화에서 내 몫을 굳이 덧붙이고 싶은 순간이 오면 한 번 멈추십시오. 그 한 줄을 지워 보십시오. 대신 함께한 사람의 이름을 먼저 불러 주십시오. 작은 일이지만 마음의 방향이 바뀌는 연습입니다.
그리고 인정받지 못해 억울한 순간이 오면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 저를 알리는 일을 아버지께 맡깁니다. 증명하려는 불안을 내려놓고, 이미 사랑받은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낮아짐은 사라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손에 나를 맡기는 일입니다.
세상은 올라가라고 말합니다.
그분은 내려오셨고, 그 길이 생명이었습니다.
소그룹 나눔
- ① 최근 나를 드러내지 않으면 손해 볼 것 같아 불안했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 ② ‘빈 영광’으로 나를 부풀리는 영역과, 그 밑에 숨은 불안은 무엇인가
- ③ 내가 낮아져야 할 사람이기 전에 그리스도가 찾아오신 사람이라는 사실이 겸손에 대한 생각을 어떻게 바꾸는가
- 한 주 나눔 과제: 일주일 동안 하루 한 번 내 공을 드러내는 말 대신 다른 사람의 수고를 먼저 말해 주고, 그때 느낀 마음의 변화를 다음 모임에서 나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자기를 비우셨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기를 그만두신 건가요?
아닙니다. 본문은 비우심을 종의 형체를 가지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신 것으로 설명합니다. 신성을 내려놓으신 것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을 더하시고 영광을 드러낼 권리를 내려놓으신 것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21문은 그리스도를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로서 사람이 되신 분, 한 위격 안에 두 본성을 지니고 영원히 계신 분으로 고백합니다. 그분은 낮아지신 순간에도 참 하나님이셨습니다.
Q2. 늘 낮아지면 결국 이용당하고 손해만 보지 않을까요?
성경의 겸손은 자기 비하나 침묵이 아닙니다. 내 가치를 사람들의 인정에서 찾지 않는 자유입니다. 그리스도는 약해서 낮아지신 것이 아니라 아버지 앞에서 확실하셨기에 낮아지셨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가 내가 내 것이 아니라 신실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는 데 있다고 고백합니다. 내가 그분의 것이라는 확신이 있을 때, 낮아짐은 손해가 아니라 담대함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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