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직하게 일하고도 승진에서 밀린 성도의 한숨을, 저는 목양실에서 여러 번 들었습니다.
짧게 답하면
당장은 손해처럼 보일 때가 분명히 있습니다. 성경도 그것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복은 많이 갖는 것이 아니라 바른 길을 걷는 것이며, 그 길은 끝내 헛되지 않습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이 질문을 가장 정직하게 던진 사람은 시편 73편의 아삽입니다. 그는 악인이 잘되는 것을 보고 발이 미끄러질 뻔했다고 고백합니다(시 73:2-3). 마음을 깨끗하게 지킨 것이 헛수고였느냐고 묻기까지 합니다(시 73:13).
성경은 이런 질문을 불신앙이라고 꾸짖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도의 언어로 받아 줍니다. 그리고 아삽의 시선이 바뀐 자리를 보여 줍니다.
“내가 하나님의 성소에 들어갈 때에야 그들의 종말을 내가 깨달았나이다” — 시편 73:17,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손해인지 이익인지는 오늘 하루만 보아서는 알 수 없습니다. 끝을 보아야 알 수 있습니다. 아삽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비로소 그 끝을 보았습니다.
요셉의 이야기도 같습니다. 그는 주인의 아내를 거절한 대가로 감옥에 갔습니다(창 39장). 바르게 산 결과가 억울한 옥살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감옥을 통해 한 민족을 살리는 길을 여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복은 무엇일까요? 시편은 첫 단어부터 그 답을 줍니다.
원어로 보면
אַשְׁרֵי
아쉬레
오, 복되도다!
“복 있는 사람은”의 “복”이 아쉬레입니다. 무엇을 받았다는 보고가 아니라 “얼마나 복된가!” 하는 감탄입니다. 시편 1편은 이 감탄을 재산이 아니라 걷는 길에 붙입니다.
그 사람은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철을 따라” 열매를 맺습니다(시 1:3). 열매는 당장이 아니라 제때에 맺힙니다. 예수님도 같은 계산법을 가르치셨습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자기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 마가복음 8:36,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한국교회에서 이 질문이 아픈 이유
목회데이터연구소 등이 함께 진행한 기독 청년 조사에서, 5명 중 2명은 성경대로 살면 이 사회에서 성공할 수 없다고 답했습니다. 교회 안의 청년 상당수가 이미 손해를 계산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이 계산은 어디서 배웠을까요? “믿으면 잘된다”는 말만 반복해 온 교회가, 바르게 살다 손해 본 청년 앞에서 할 말을 잃은 것은 아닐까요? 그 청년이 정말 들어야 했던 말은 손해를 견딜 이유가 아니었을까요?
성경은 바른길이 언제나 편하다고 약속하지 않습니다. 대신 그 길 위에서 혼자 걷지 않는다고 약속합니다.
손해를 부정하는 신앙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손해를 알고도 걷는 신앙이 오래갑니다.
이런 질문이 자주 올라옵니다
입사 1~2년 차 직장인의 질문이 많습니다. 실적 보고서의 숫자를 조금 부풀리라는 지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거절하면 팀에서 혼자 튀는 사람이 됩니다.
“이 정도는 다들 하는데 저만 유난인가요?”라는 물음이 대개 뒤따릅니다. 그리고 버티다 손해 보면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느냐고 묻습니다.
이런 분께는 먼저 정중한 대안을 내밀어 보라고 권합니다. 숫자 대신 설명을 더하는 보고서, 상사와의 일대일 대화 같은 길이 있습니다. 그래도 거짓을 요구받는다면, 그때의 손해는 하나님 앞에서 기록되는 손해입니다.
이 본문에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은 오늘만이 아니라 끝을 보시는 분입니다. 아삽에게 끝을 보여 주셨고, 요셉의 감옥에서도 일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이면서도 자기를 비워 가장 큰 손해의 길을 먼저 걸으셨습니다(빌 2:6-8).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산 하루는, 결코 손해 본 하루가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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