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지 않는 사람과 연애해도 되나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사람이 교회를 다니지 않는다는 고민을, 저는 청년 시절 가까이서 여러 번 지켜봤습니다. 마음은 이미 기울었는데 말씀은 멈추라고 하는 것 같아서 더 괴로우셨을 겁니다.

짧게 답하면

성경은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과 삶의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연애 자체가 죄의 목록에 올라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연애는 결혼으로 가는 길입니다. 그래서 지금 사귀어도 되느냐보다, 이 길 끝에서 둘이 함께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느냐를 먼저 물어야 합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이 구절은 흔히 연애 금지 조항처럼 쓰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이 말을 꺼낸 자리부터 봐야 합니다. 고린도 교회는 우상 숭배가 일상인 도시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이 그 문화와 깊이 엮여 신앙의 중심을 잃어 가는 것을 염려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마음을 넓히라고 호소합니다.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고후 6:13). 그리고 곧바로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고린도후서 6:14,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원어로 보면

ἑτεροζυγοῦντες

헤테로쥐군테스

서로 다른 종류가 한 멍에를 메다, 짝이 맞지 않게 묶이다

헬라어 · 고린도후서 6:14

율법은 소와 나귀를 한 멍에에 매어 밭을 갈지 말라고 했습니다(신 22:10). 둘이 나쁜 짐승이라서가 아닙니다. 걸음이 다르고 힘의 방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 멍에에 묶이면 둘 다 다칩니다.

바울이 직접 겨냥한 것은 우상 숭배와의 결탁입니다. 결혼만을 말하는 구절은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이 멜 수 있는 가장 무거운 멍에가 무엇일까요? 한 이불을 덮고, 한 통장을 쓰고, 한 아이를 키우는 결혼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오래도록 이 말씀을 결혼에 적용해 왔습니다. 바울 자신도 결혼은 주 안에서 하라고 권합니다(고전 7:39).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고린도후서 6:16,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이것이 이유입니다. 바울은 상대를 깎아내리지 않습니다. 대신 나를 높입니다. 당신은 하나님이 사시는 집입니다. 그 집의 주인을 모르는 사람과 집 열쇠를 나눌 수 있을까요?

교회 안에서 짝을 찾기 어려운 청년에게

현실은 말씀처럼 깔끔하지 않습니다. 청년부는 작아지고, 또래는 줄고, 교회 안에서 만남을 기대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회사에서 만난 그 사람은 다정하고 성실합니다. 어떤 교회 사람보다 나를 더 존중해 주기도 합니다.

그 마음을 저는 가볍게 여기지 않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이 더 따뜻할 수 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질문을 바꿔 보십시오. 좋은 사람인가에는 이미 답이 나왔습니다. 이 사람과 같은 방향으로 걸을 수 있는가에는 아직 답이 없습니다.

연애와 결혼은 다릅니다. 연애는 서로를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결혼은 나란히 서서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삶입니다. 마주 볼 때는 보이지 않던 차이가 나란히 걸을 때 드러납니다. 주일 아침마다, 헌금을 정할 때마다, 아이에게 기도를 가르칠 때마다 드러납니다.

사귀다 보면 언젠가 교회에 오겠지 하는 기대도 조심스럽게 내려놓으십시오. 연애는 전도의 도구가 아닙니다. 사람을 바꾸는 분은 내가 아니라 성령이십니다.

이런 질문이 자주 올라옵니다

이미 사귄 지 꽤 되었다는 고백이 많습니다. 처음엔 가볍게 시작했는데 마음이 깊어졌고, 이제 와서 신앙 이야기를 꺼내기가 두렵다고 합니다. 교회 사람들에게 들킬까 봐 조심스럽고, 하나님께 죄를 짓고 있는 것 같아 기도도 멀어졌다고 합니다.

반대로 상대가 신앙을 존중해 준다는 사연도 있습니다. 예배 시간을 지켜 주고, 함께 교회에 와 보겠다고까지 합니다. 그런데 정작 예수님을 믿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먼저 숨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당신을 정죄하려고 기다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상대에게 내 신앙이 내 삶의 중심이라는 것을 정직하게 말하십시오. 그것이 상대를 존중하는 길입니다. 믿을 만한 신앙의 선배와 함께 이 관계를 열어 놓고 기도하십시오. 결혼을 이야기하기 전에, 상대가 스스로 복음 앞에 서는지 지켜볼 시간을 가지십시오. 그 과정에서 멈춰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면 아플 겁니다. 그러나 그 아픔은 하나님이 버려두시는 아픔이 아닙니다.

이 본문에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

이 본문의 하나님은 금지하시는 분이기 전에 함께 사시겠다는 분입니다.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고후 6:16). 그리고 끝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고후 6:18). 멍에를 내려놓으라는 말씀은 빼앗음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자녀의 평생을 지키시는 방식입니다. 당신의 외로움을 아시는 분이 당신의 짝도 아십니다.

지금 그 사람과 걷는 길은 어디를 향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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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답변: 지중배 (성경강해학 박사 · 한국성서대 외래교수)

남양주 다산에서 담임목사가 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