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8:1은 죄책감이 사라졌다는 감정 보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정에서 내려진 최종 판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사람에게는 형벌로 이어지는 유죄 판결이 단 하나도 남아 있지 않습니다. 이 평안은 내 기분이 좋아서 생기지 않습니다. 판결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잠들기 직전이 제일 위험합니다. 불을 끄고 누우면 머릿속에 법정이 하나 열립니다. 몇 년 전에 내뱉은 말 한마디가 증거로 제출됩니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 증인석에 앉습니다. 검사도 나, 배심원도 나, 판사도 나입니다. 판결은 늘 같습니다. 유죄.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이미 회개한 일인데도 재판이 다시 열립니다. 용서받았다고 고백한 일인데도 또 피고석에 앉습니다. 당신의 밤에도 이런 재판정이 열립니까? 당신은, 같은 사건으로 몇 번째 자신을 법정에 세우고 있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로마서 8:1, 성경: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비명 바로 다음에 놓인 문장
로마서 8:1은 진공 속에서 떨어진 말이 아닙니다. 바로 앞, 7장 끝에서 바울은 비명을 지릅니다. 원하는 선은 하지 않고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한다고 고백합니다(7:19). 그리고 이렇게 외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7:24).
이 문장이 낯설지 않은 분이 많을 겁니다. 밤의 재판정에서 우리가 하는 말과 똑같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 비명을 숨기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감사를 터뜨립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7:25). 그 감사 위에 8장의 첫 문장이 섭니다. 그러므로 이제, 정죄함이 없다.
“그러므로”의 근거도 분명합니다. 바울은 곧이어 이유를 댑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8:2). 근거는 내 감정의 회복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입니다.
로마서 8장 전체의 모양도 눈여겨보십시오. 이 장은 정죄함이 없다는 선언으로 문을 열고, 끊을 수 없다는 선언으로 문을 닫습니다(8:39). 그 사이 33절과 34절에서 바울은 법정 언어로 다시 돌아옵니다.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8:33). “누가 정죄하리요”(8:34). 1절의 판결을 장 끝에서 한 번 더 두드려 확정하는 것입니다.
단 하나도, 지금, 판결문
헬라어 원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우덴 아라 뉜 카타크리마(οὐδὲν ἄρα νῦν κατάκριμα). 맨 앞에 놓인 말이 ‘우덴'(οὐδέν)입니다. ‘아무것도 없다’, ‘단 하나도 없다’는 뜻입니다. 헬라어는 강조하고 싶은 말을 앞으로 끌어냅니다. 바울은 문장 첫머리부터 못을 박습니다. 없다. 하나도. 개역개정이 “결코”라고 옮긴 무게가 여기에 있습니다.
핵심 단어는 ‘카타크리마'(κατάκριμα)입니다. 단순히 ‘나쁘게 생각함’이 아닙니다. 법정에서 내려진 유죄 판결, 그리고 그 판결에 따라오는 형벌까지 포함하는 말입니다. 신약 전체에서 이 단어는 로마서에만 세 번 나옵니다(5:16, 5:18, 8:1). 5장에서 바울은 아담의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르렀다고 말했습니다(5:18). 온 인류 위에 내려졌던 그 판결이, 8장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게는 없다고 선언됩니다.
그리고 ‘뉜'(νῦν), “이제”가 있습니다. 나중에 내가 더 나아지면, 이 죄를 완전히 끊으면, 마음이 충분히 평안해지면이 아닙니다. 지금입니다. 판결의 효력은 이미 발생했습니다.
감정은 날씨이고, 판결은 주소입니다
감정은 날씨와 같습니다. 어제는 맑았다가 오늘은 흐립니다. 실수 하나에 폭우가 쏟아지고, 칭찬 한마디에 해가 뜹니다. 날씨가 나쁘다고 내 집 주소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로마서 8:1은 날씨 이야기가 아닙니다. 주소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8:1). 바울은 잘하는 자, 느끼는 자라고 쓰지 않았습니다. 있는 자라고 썼습니다.
여기서 죄책감과 수치심을 나눠 볼 필요가 있습니다. 죄책감은 ‘내가 잘못했다’고 말합니다. 수치심은 한 걸음 더 들어가 ‘나는 잘못된 존재다’라고 말합니다. 청년들을 오래 붙드는 것은 대개 두 번째입니다. 이 구절은 둘 다 다룹니다. 판결은 행위에 대한 형벌을 지웁니다. 그리스도 안이라는 주소는 존재를 새로 규정합니다. 당신은 더 이상 실패한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등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마음을 찌르는 모든 소리를 무시하면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성령도 죄를 깨닫게 하십니다(요 16:8). 다만 방향이 다릅니다. 성령의 책망은 나를 그리스도께로 밀어 보냅니다. 정죄의 목소리는 나를 나 자신 안에 가둡니다. 책망은 ‘돌아오라’고 부릅니다. 정죄는 ‘너는 끝났다’고 선고합니다. 같은 죄를 두고도 하나는 문을 열고, 하나는 문을 잠급니다.
밤마다 열리는 재판정의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미 닫으신 사건을 내가 다시 엽니다. 겸손해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판결보다 내 판결을 더 믿는 일입니다. 최고 법정이 무죄를 선고했는데 하급 법원이 계속 유죄를 외치는 셈입니다.
예수님이라면 이 구절을 어떻게 읽으실까
우리는 이 구절을 늘 피고석에서 읽습니다. 나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그런데 이 구절을 정반대 자리에서 읽으신 분이 계십니다.
3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자기 아들을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8:3). 여기서 ‘정하사’로 옮긴 동사가 ‘카테크리넨'(κατέκρινεν)입니다. 1절의 ‘카타크리마’와 같은 뿌리입니다. 정죄는 증발하지 않았습니다. 집행되었습니다. 다만 우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육신 위에서 집행되었습니다.
복음서는 그 장면을 기록합니다. 공회는 예수님을 사형에 해당하는 자로 정죄했습니다(막 14:64). 온 세상을 심판하실 재판장이 피고석에 서셨습니다. 그리고 침묵하셨습니다. 내 밤의 재판정에서 울려야 할 ‘유죄’라는 선고가, 그날 그분 위에 떨어졌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8장의 장면이 다르게 읽힙니다. 간음 중에 잡힌 여인 앞에서 돌을 던질 자격이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이셨습니다. 그분이 말씀하십니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 8:11). 이 말은 죄를 대충 넘기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여인이 받아야 할 정죄를 곧 당신이 받으러 가신다는 뜻입니다.
법에는 일사부재리라는 원칙이 있습니다. 같은 사건으로 두 번 처벌하지 않는다는 원칙입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십니다. 이미 값을 치른 죄에 대해 두 번 청구하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치르셨다면, 당신에게 다시 청구될 형벌은 없습니다.
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
이 구절에서 하나님은 먼저 의로우신 분으로 드러납니다. 죄를 못 본 척하지 않으십니다. 정죄는 실제로 내려졌고 실제로 집행되었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자비로우신 분입니다. 그 정죄를 우리가 아니라 당신의 아들이 받게 하셨습니다. 의와 자비가 십자가에서 부딪히지 않고 입 맞춥니다.
또 하나님은 판결을 뒤집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판결을 고쳐 씁니다. 하나님은 한 번 의롭다 하신 사람을 다시 피고석에 세우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먼저 말씀하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평안을 느끼기 전에 판결을 선포하십니다. 평안은 그 판결을 믿을 때 뒤따라옵니다.
오늘 밤 재판정이 다시 열리면
오늘 밤에도 그 법정은 열릴 수 있습니다. 그때 도망치지 말고 이렇게 해 보십시오.
먼저 혐의를 구체적으로 적어 보십시오. 막연한 ‘나는 형편없다’가 아니라 ‘그날 그 말을 했다’처럼 사건으로 씁니다. 수치심은 흐릿할수록 커집니다. 이름을 붙이면 다룰 수 있습니다.
그다음 물으십시오. 이 일을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고백했는가. 아직이라면 지금 고백하십시오. 하나님은 자백하는 자의 죄를 미쁘시고 의로우셔서 용서하십니다(요일 1:9). 상처를 준 사람이 있다면 사과하고 관계를 회복하십시오. 그것이 성령의 책망에 응답하는 길입니다.
이미 고백한 일이라면, 사건을 다시 열지 마십시오. 대신 로마서 8:1을 소리 내어 읽으십시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 자리에 당신의 이름을 넣어 읽으십시오. 감정이 따라오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판결은 감정의 동의를 기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혼자 견디지 마십시오. 믿을 만한 신앙의 친구 한 사람에게 털어놓고 함께 기도를 부탁하십시오(약 5:16). 어둠 속에서 커지던 혐의는 빛 아래서 제 크기로 돌아옵니다.
재판정은 밤마다 다시 열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판결은 이미 나왔습니다. 정죄함이 없습니다.
소그룹 나눔
- ① 내 머릿속 재판정에 가장 자주 제출되는 ‘증거’는 어떤 기억인가, 그 사건을 하나님 앞에 이미 고백했는가
- ② 성령의 책망과 정죄의 목소리를 구별해 본 경험이 있는가, 그 둘은 나를 각각 어디로 데려갔는가
- ③ 나는 평안을 판결에서 찾아 왔는가, 그날의 기분에서 찾아 왔는가
- 한 주 나눔 과제: 판결문 낭독 — 일주일 동안 잠들기 전에 로마서 8:1에 내 이름을 넣어 소리 내어 읽고, 그 주에 재판정이 열렸던 순간과 그때 붙든 말씀을 다음 모임에서 나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정죄함이 없다면 이제 죄를 지어도 괜찮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바울은 정죄 없음을 선언한 뒤 곧바로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8:4). 판결은 방종의 허가증이 아니라 새 삶의 출발점입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64문은 이 가르침이 사람을 부주의하고 악하게 만들지 않느냐는 질문에, 참된 믿음으로 그리스도께 접붙여진 사람이 감사의 열매를 맺지 않을 수 없다고 답합니다. 정죄에서 풀려난 사람은 두려움 때문이 아니라 감사 때문에 죄와 싸웁니다.
Q2. 판결이 끝났다는데 왜 저는 여전히 죄책감에 시달릴까요?
감정은 판결보다 늦게 도착하기 때문입니다. 양심은 오래된 습관대로 계속 고소할 수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60문은 바로 이 상황을 다룹니다. 내 양심이 내가 하나님의 모든 계명을 어겼고 여전히 악으로 기운다고 고소해도, 하나님은 내 공로 없이 순전한 은혜로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를 내게 주시고 내 것으로 여겨 주신다고 고백합니다. 양심의 고소가 사라져서 의로운 것이 아닙니다. 고소가 들려도 판결이 서 있기에 의롭습니다.
Q3. 다른 사람들이 저의 과거를 들추며 정죄하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사람의 판단은 아프지만 최종 판결이 아닙니다. 바울은 묻습니다. “누가 정죄하리요”(8:34). 그리고 답합니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서 우리를 위해 간구하신다고 말입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제33문은 칭의를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의 행위로 정의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오직 우리에게 전가되어 믿음으로 받은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우리를 의롭다고 받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상처를 준 일이 있다면 겸손히 사과하십시오. 그러나 당신의 존재에 대한 최종 판결은 하나님께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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