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일조, 꼭 해야 해요? 안 하면 저주받나요?

헌금 시간마다 봉투를 만지작거리던 청년 시절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짧게 답하면

십일조를 못 한다고 저주받지 않습니다. 저주는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대신 받으셨습니다. 다만 십일조는 내 소득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하는 오래된 감사의 기준입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말할까요

“저주”라는 말이 나오는 본문은 말라기 3장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개인의 지갑을 겨냥한 협박문이 아닙니다. 제사장은 흠 있는 제물을 바쳤고, 백성은 레위인의 몫을 끊었습니다.

성전 창고가 비자 레위인들은 생계를 위해 밭으로 흩어졌습니다(느 13:10).

말라기가 꾸짖은 것은 언약 공동체 전체의 배신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마음이 먼저였고, 빈 창고는 그 결과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벌보다 먼저 초청하십니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말 3:7).

신약은 이 저주 문제에 분명한 답을 줍니다. 율법의 저주는 그리스도께서 짊어지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 갈라디아서 3:13,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그렇다면 십일조는 이제 아무 의미가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율법이 주어지기 수백 년 전에 멜기세덱에게 십분의 일을 드렸습니다(창 14:20). 전쟁에서 이기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도 십일조를 지키던 바리새인에게 그것을 버리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의와 긍휼과 믿음을 함께 붙들라고 하셨습니다(마 23:23).

신약 교회가 드림의 기준으로 붙든 말씀은 고린도후서 9장입니다. 바울은 액수보다 마음의 방향을 먼저 묻습니다.

원어로 보면

ἱλαρός

힐라로스

기쁘게, 환하게 웃으며

헬라어 · 고린도후서 9:7

“즐겨 내는 자”의 “즐겨”가 힐라로스입니다. 영어 hilarious의 먼 뿌리가 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받으시는 헌금은 억지로 짜낸 돈이 아니라 웃으며 내미는 손이라는 뜻입니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 고린도후서 9:7,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한국교회에서 이 질문이 아픈 이유

한국교회에서 십일조는 오랫동안 신앙의 성적표처럼 쓰였습니다. 직분을 맡을 때 헌금 기록을 확인하는 교회도 있었습니다. 강단에서 “안 내면 복이 새어 나간다”는 말을 들은 분도 적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두려움으로 낸 십일조를 하나님이 기뻐하실까요? 반대로 “율법이니까 이제 안 해도 된다”는 말은 정말 자유일까요? 혹시 그 말 뒤에서 돈의 주인 자리를 다시 내가 차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두려움도 핑계도 답이 아닙니다. 십일조는 하나님과 맺는 거래가 아니라, 받은 은혜를 기억하는 연습입니다.

아직 십분의 일이 버겁다면 작은 비율이라도 정해서 꾸준히 시작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금액보다 방향을 보십니다.

이런 질문이 자주 올라옵니다

첫 월급을 받은 사회초년생의 질문이 해마다 반복됩니다. 십일조는 세전으로 내야 하나요, 세후로 내야 하나요? 학자금 대출을 갚는 중인데 그래도 내야 하나요?

질문 끝에는 대개 같은 두려움이 붙어 있습니다. 못 내면 하나님이 벌을 주실까 봐 무섭다는 것입니다.

세전과 세후는 교회마다 권하는 기준이 다릅니다. 더 중요한 질문은 그 돈이 누구의 것인가입니다. 형편에 맞는 비율을 기도로 정하고, 두려움이 아니라 감사로 지키십시오.

이 본문에 드러난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그러나 그 주인은 억지로 거두어 가는 분이 아닙니다. 먼저 주시는 분입니다.

아들까지 아끼지 않으신 분이 우리에게서 받으시는 것은 결국 돈이 아니라 마음입니다(롬 8:32).

십일조는 하나님께 바치는 세금이 아니라, 먼저 받은 사람이 드리는 대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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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답변: 지중배 (성경강해학 박사 · 한국성서대 외래교수)

남양주 다산에서 담임목사가 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