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23편은 힘든 일이 없을 것이라는 약속이 아닙니다. 이 시에는 음침한 골짜기도 있고 원수도 있습니다. 약속은 골짜기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골짜기 안에 목자가 함께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길의 끝에 집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시편을 장례식장에서 가장 많이 읽었습니다. 관 앞에서, 울음이 채 가라앉지 않은 가족들 앞에서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읽는 제가 먼저 위로를 받았습니다. 짧은 여섯 절이 어떻게 그 무거운 자리를 버텨 낼까요. 당신은 이 시편을 언제 마지막으로 소리 내어 읽으셨습니까.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편 23:1-6, 성경: 개역개정 ⓒ대한성서공회)
목자였던 왕이 부른 노래
이 시의 제목은 “다윗의 시”입니다. 다윗은 왕이 되기 전에 양을 쳤습니다. 사자와 곰에게서 양을 건져 낸 목동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노래는 목자를 아는 사람이 쓴 노래입니다. 그런데 그가 이 시에서 서 있는 자리는 목자의 자리가 아닙니다. 양의 자리입니다. 왕이 된 뒤에도 그는 스스로를 양이라 불렀습니다. 성경에서 왕은 백성의 목자로 불립니다. 그 목자가 고백합니다. 나에게도 목자가 필요하다고.
시의 흐름도 눈여겨보십시오. 1절부터 3절까지 다윗은 하나님을 “그”라고 부릅니다. 목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4절, 골짜기에 들어서는 순간 호칭이 바뀝니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그에 대한 이야기가 당신께 드리는 말로 바뀝니다. 가장 어두운 자리에서 설명은 멈추고 대화가 시작됩니다.
선하심이 사냥개처럼 따라온다
6절의 “따르리니”로 번역된 히브리어 동사는 ‘라다프'(רָדַף)입니다. 이 단어는 성경에서 주로 적을 추격할 때 쓰입니다. 뒤에서 느긋하게 따라오는 것이 아니라, 놓치지 않으려고 쫓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문장은 이렇게 들립니다.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평생 나를 추격한다. 내가 도망쳐도, 내가 잊어버려도, 끝까지 쫓아와 붙잡는다.
“인자하심”은 ‘헤세드’입니다. 언약에 묶인 사랑, 상대가 신실하지 않아도 거두어들이지 않는 사랑입니다. 앞에서는 목자가 길을 이끌고, 뒤에서는 헤세드가 쫓아옵니다. 양은 그 사이에서 걷습니다. 앞뒤가 다 막혀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앞뒤가 다 지켜지고 있는 것입니다.
골짜기는 지름길이 아니라 목자의 길이다
2절과 3절을 다시 보십시오.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 그리고 의의 길. 모두 목자가 인도하는 길입니다. 그런데 4절의 음침한 골짜기도 그 길 위에 있습니다. 양이 길을 잃어서 들어간 골짜기가 아닙니다. 목자가 데리고 지나가는 골짜기입니다. 이것이 시편 23편의 가장 정직한 부분입니다. 목자를 따라가도 골짜기는 나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다릅니까. 다윗은 “다닐지라도”라고 말합니다. 머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입니다. 골짜기는 거처가 아니라 통로입니다. 그리고 지팡이와 막대기가 있습니다. 막대기는 들짐승을 쫓는 무기이고, 지팡이는 길에서 벗어난 양을 끌어당기는 도구입니다. 하나는 밖의 적을 막고, 하나는 안의 방황을 붙듭니다. 골짜기에서 양을 지키는 것은 양의 용기가 아닙니다. 목자의 손에 들린 두 개의 도구입니다.
5절에서 그림이 바뀝니다. 목자가 이제 잔치의 주인이 됩니다. 원수가 사라진 뒤가 아니라, 원수가 보는 앞에서 상이 차려집니다. 위협이 끝나야 평안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위협 한가운데서 식탁이 펼쳐집니다.
예수님은 이 시편을 어떻게 읽으셨을까
질문을 뒤집어 봅시다. 우리는 늘 이 시편을 양의 자리에서 읽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 시편의 목자를 자신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요 10:11). 다윗의 목자는 골짜기를 함께 지나갔습니다.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들어가셨습니다. 사망의 골짜기 가장 깊은 바닥까지 혼자 내려가셨습니다.
바로 앞의 시편 22편을 기억하십니까. “내 하나님이여 내 하나님이여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부르짖으신 시편입니다. 22편을 지나야 23편이 옵니다. 목자가 버림받는 골짜기를 먼저 통과하셨기에, 양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이라고 노래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시편은 이렇게 다시 읽힙니다. 내가 골짜기를 지날 수 있는 이유는 내가 강해서가 아니라, 그분이 이미 그 골짜기의 끝을 부수셨기 때문이다.
이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성품
이 시편의 하나님은 앞에서 이끄시고, 곁에서 함께하시고, 뒤에서 쫓아오시는 분입니다. 한 방향만 지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사방에서 붙드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인도하십니다. 양의 자격 때문이 아닙니다. 자기 이름을 걸고 인도하시기에, 양이 넘어져도 목자의 약속은 넘어지지 않습니다. 이 목자는 들판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집 문을 열고 기다리시는 주인이십니다.
오늘, 호칭 하나만 바꾸기
오늘 가장 무거운 문제 하나를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다윗이 4절에서 한 일을 따라 해 보십시오. 하나님에 대해 말하던 문장을 하나님께 말하는 문장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도우실 거야”가 아니라 “주께서 지금 나와 함께 계십니다.” 골짜기는 그대로여도, 혼잣말이 기도가 됩니다.
소그룹 나눔
- ① 지금 내 삶은 푸른 풀밭, 음침한 골짜기, 원수 앞의 식탁 가운데 어디에 가장 가까운가
- ② 목자를 따라가는데도 골짜기를 만났던 경험이 있는가, 그때 무엇이 나를 붙들었는가
- ③ 나를 끝까지 쫓아온 하나님의 선하심을 뒤늦게 알아챈 순간이 있는가
- 한 주 나눔 과제: 추격 일기 — 하루 한 줄, 그날 나를 따라온 선하심 하나를 기록하고 다음 모임에서 함께 나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시편 23편은 장례식 시편입니까?
장례식에서 많이 읽히지만 죽음의 시편만은 아닙니다. 이 시는 살아서 걷는 길, 먹는 식탁, 매일의 인도를 노래합니다. 다만 죽음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는 위로를 품고 있기에 장례식에서 빛납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1문은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의 유일한 위로가 무엇이냐고 묻고, 내가 나의 것이 아니라 신실한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답합니다. 시편 23편이 바로 그 위로입니다. 삶과 죽음 양쪽에서 같은 목자의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Q2.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데, 가난하거나 아프면 믿음이 부족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 시에서 부족함이 없다는 말은 원하는 것을 다 가진다는 뜻이 아니라, 목자가 필요한 것을 채우신다는 뜻입니다. 그 필요에는 골짜기를 지나는 길도 들어 있습니다. 하이델베르크 교리문답 제26문은 전능하신 아버지께서 몸과 영혼에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며, 이 눈물 골짜기에서 겪게 하시는 어떤 악도 선으로 바꾸신다고 고백합니다. 부족함이 없다는 것은 결핍이 없다는 뜻이 아니라, 목자가 없는 순간이 없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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